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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30. 2015

뇌성마비 철학자 졸리앙 “한국 목욕탕은 경이로운 학교”

<왜냐고 묻지 않는 삶> 작가 인터뷰


서울 대흥동 자택에서 만난 스위스 철학자이자 수행가인 알렉상드르 졸리앙(40)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선물’이라는 단어였다. 그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베르나르 세네칼 신부)도, 일상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서울 생활도 모두 귀한 선물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그는 하루하루 선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뇌성마비 장애로 인해 보행은 물론 말하는 것도 힘겨운 푸른 눈의 철학자의 입에서 나온 선물이라는 단어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사실 그는 태생부터 선물 같은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럭 운전사인 아버지와 가정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탯줄이 목에 감긴 채 세상에 나와 그 후유증으로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갖게 됐다. 세 살 때 요양시설에 보내져 스무 살까지 지냈으며, 아홉 살이 돼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하층민으로,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온갖 고통과 어려움이 그를 괴롭혔지만, 내면에 잠자고 있던 인식에 대한 열망으로 철학에 빠지게 돼 스위스 프리부르 문과대학에서 철학을,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철학과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하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아카데미프랑세즈에서 수여하는 모타르상과 몽티용 문학철학상을 수상한 첫 책 <약자의 찬가>를 시작으로 <인간이라는 직업> <자아의 구성> <벌거벗은 철학> 등을 통해 남다른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반영된 독창적인 철학서들을 펴냈고, 특히 2012년에 나온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프랑스 아마존 32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등 밀리언셀러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펴낸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은 졸리앙-혜천이란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붓다의 지혜를 동시에 구하는 수행자인 그가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3년간 생활하면서 겪은 진솔한 체험과 사색의 결실을 담은 에세이다. 유럽에서 인간 승리의 아이콘이자 유명 철학가로 명성을 떨치던 그가 돌연 아내와 어린 세 자녀를 이끌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고 묻지 않는 삶, 불안과 비본질적 계획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


Q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쩌면 삶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고 묻는 삶’이 아니라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 돼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철학자나 아이들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은 매우 건설적인 질문이며, 우리를 세계로 우주로 개방해주는 질문입니다. 반면 노이로제에 찌든 우리의 정신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은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왜곡시켜 병들게 하지요. 미래나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질문은 삶의 족쇄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제 장애에 대해 왜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무의미할 뿐더러, 제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대신 제가 삶의 매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자체에 감격하고 감사한다면, 진정한 행복으로 저를 이끌어갈 ‘왜’라는 질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겁니다.

Q 그렇다면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요?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은 무엇보다 삶을 단순화하는 의지입니다. 현실에 토를 달지 않아야 가능한 삶이죠. 현실에 토를 달고 판단하다보면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불만과 불행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은 타인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삶입니다. 남에게 보다 너그럽고 헌신적인 삶이지요. 요컨대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비본질적인 계획들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우리 삶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혹시 불안, 짜증, 남의 시선이 아닌지, 행복한 척, 잘난 척, 센 척하며 거짓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Q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로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셨는데, 이번 책은 이전 책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복음서와 참선의 위대한 메시지, 그 속에 담긴 원리들을 제 나름대로 사색해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반면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은 서울이라는 도시, 즉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면서 그 모든 사색의 결실을 기록한 책이지요.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은 일상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도장(道場)으로 삼아 구체적인 지혜를 탐구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Q 스위스인으로 가톨릭 신자이면서 불교의 선을 수행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정신의 지혜이자 과학입니다.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아와 싸워나가는 방법을 제시해줍니다. 자아에서 벗어나 보다 선량하고 고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주지요. 참선은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거짓들을 만들어내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해줍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불교의 명상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하여 침묵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에게 나를 완전히 개방하는 방법을 일러줍니다.

Q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신 것으로 압니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고타마 붓다를 만난 예수 그리스도님>을 출간하고 라디오 프랑스에서 인터뷰한 서명원 교수님의 동영상을 접하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2011년 벨기에를 방문하셨을 때 처음 만나뵙고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영적인 스승으로 모시게 됐고요. 유럽에서는 사회적인 활동이 많아 깊은 차원의 지혜를 실천적으로 살기가 힘들어 서명원 교수님께 한국에 오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한국에서 영적인 스승인 서명원 신부님과 더불어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을 일상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 기쁩니다.

Q 한국에 와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 언어 장벽입니다. 제 아이들은 매우 빠르게 한국어를 익혔고 지금은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저와 아내는 아직 한국어가 어렵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겠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친구와의 참다운 우정이란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기에, 저는 지금 한국 친구들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 중입니다. 그런데 언어 문제 등으로 쉽지가 않네요.


“능력 증명해야 하는 한국 청년들 강박이 ‘헬조선’ 현상으로 나타나”


그런 점에서 공중목욕탕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학교인가! 거기서는 때 찌꺼기뿐 아니라 각종 노이로제, 자기 혐오, 육체에 대한 멸시, 타인의 시선까지 모두 증발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의 단순함이란 나를 항상 놀라게 한다. 무얼 보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내려놓음이 핵심이다. 나의 모든 콤플렉스, 심리적 억압, 내가 신경 써온 역할들, 억지로 부과된 책임들, 요컨대 내가 나이기를 방해해온 모든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지금껏 나는 백 퍼센트 장애인이었던 적이 없다. 하루 온종일 나를 교정하려 하고 다른 누군가가 되려 애썼다. 이젠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고 지쳐버렸다 한들 놀랄 일이겠는가?

- <왜냐고 묻지 않는 삶> 253쪽 ‘본성의 재발견’ 가운데


Q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라는 화두를 불어넣어준 곳이 한국의 목욕탕이었다고요.

목욕탕은 우리를 삶의 단순성으로 이끌어주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든 꼬리표를 떼어내고 가면들을 벗어던집니다. 행복이란 구체적인 일상 속에 깃들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요. 또한 목욕탕은 우리 육체가 성스러운 것이며, 존재의 각성이자 신과의 합일로 우리를 데려가는 일종의 ’탈 것’ 혹은 매개체임을 가르쳐줍니다. 저는 매일 목욕탕에서 1시간쯤 보내고 있는데, 하루 중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입니다. 

Q “한국에서의 삶은 내 인생의 굉장한 선물이 되고 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어떤 의미에서인가요?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줬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두려워하고 반대했던 가족들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요.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저에게 정신의 악습을 버리고, 나를 정의하는 인위적인 온갖 꼬리표들을 떼어내 완전히 다른 삶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규정에 안주하지 않고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매일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고 발견하는 것은 무한한 즐거움입니다. 

Q 처음 방문할 때 1년 정도 계획했던 한국생활이 2년이 지나 3년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떤가요?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계속 영적인 삶을 실천에 적용하는 걸 심화시키고 있어요. 유럽을 떠난 것도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떨쳐내고 깊은 평화를 맛보기 위해서인데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내적인 완전한 평화를 찾으면 스위스로 갈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아내와 세 아이들 모두 적응을 잘하고 있어서 당장 떠날 계획은 없습니다.

Q 3년간의 한국생활에서 느낀 점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한국에 와서 제일 놀랐던 게 교회가 정말 많다는 거였습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문화가 풍부하구나’ 생각했어요. 반면 실제 삶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됐죠. 일을 굉장히 많이 하는데 그만큼 편하게 생활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한국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폐지를 손수레에 싣고 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지요.

또한 어린 학생들이 지나치게 공부 스트레스를 받고 경쟁 환경에 노출돼 있는 것은 굉장히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는 한국 청년들의 사회적 압박감이 ‘헬조선’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교육이 경쟁의 장이 아니라 명석한 정신과 너그러운 인간을 키우는 방향으로 바뀌면 이런 현상들이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요. 

Q 말씀하신 대로 한국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그리 높지 않은 편입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스트레스는 우리 삶을 좀먹는 요인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는지 지나치게 의식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받게 돼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가슴, 자기 영혼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자꾸 외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로봇과 같은 삶을 살게 되지요. 오늘날 페이스북이나 그밖의 온갖 소셜 네트워크는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자연스러운 교류를 방해하고 왜곡합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런 부작용이 만연하는 현상은 분명 불행하다는 자의식이 싹트는 토양이 됩니다. 남의 시선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압박감, 거짓된 목표에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Q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유명 철학가로 왕성한 활동을 벌여 ‘희망의 아이콘’이 되셨는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신다면요? 

저는 삶이 힘들 때 영적인 삶에 대한 욕구로 극복했습니다. 영적인 삶에 대한 지향점 없이 자신을 단독자, 즉 동떨어진 개인이라고 생각하면 남과 비교하게 됩니다. 그러면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장애 그 자체는 하나의 선물이자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걸 통해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영적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남에게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인 삶에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그 가치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영적인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고, 참다운 벗과 교류하며, 구체적으로 남을 돕는 자세. 이 세 가지를 함께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누구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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