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학교 가는 길은 벼의 고개가 숙여지고 고구마에 밑이 들며, 땅콩이 여물어가는 가을철에 더욱 풍성해지기 마련. 벼이삭을 꺾어 앞니로 한 톨씩 껍질을 벗긴 다음 입안에 차곡차곡 쌓아놓았을 때,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그 달착지근한 뜨물 맛이란. 그 가운데서도 땅이 쩍쩍 갈라진 고구마 밭이야말로, 모두가 군침을 흘리는 일급 사냥터. 귀한 옥동자를 더 이상 품고 있을 수 없다는 듯, 스스로 배를 가르고 붉으죽죽한 햇고구마를 밖으로 토해내는 대지(大地)의 섭리 앞에서 악동들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고구마 서리는 대개 비 오는 날로 정해졌다. 보는 사람들의 눈이 적고, 빗줄기에 시야가 가려질 뿐만 아니라, 빗물에 발자국이 씻겨 내려감으로써 '증거'를 인멸할 수 있기 때문. 마치 보물을 캐듯 탐욕을 부리는 '도굴꾼'들의 손에 이끌려 고구마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온 순들은 밭 가운데로 다시 던져지고, 도랑물에 대강 씻긴 '알토란'을 바지에 쓱싹 문지른 다음, 한입 와삭 베어 물 때의 그 진하고 진한 감동이란. 녹말이 혀끝을 간지럽히고, 꺼칠꺼칠한 알맹이들이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갈 때의, 그 감촉이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구마를 젖히고, 인기 순위 1위로 뛰어오른 작물이 바로 땅콩이었다. 무라리 일대에 땅콩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떼놈들' 덕택이었다. 중국 사람들 서너 명이서 인근의 밭을 몽땅 사들이더니, 삼백여 마지기에 이르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늘 유식하다고 자부하는 이씨.

"느그덜, 땅콩이 어째서 땅콩인지 아냐?"

".........."

"봄이 되먼 땅에 씨를 숨글 것 아니냐? 그러먼 그 씨 자체를 양분 삼어 갖고, 싹이 올라 오디야 안. 그래 갖고 노오런 꽃이 피고, 이 꽃이 시듬시로 끄턴머리가 침같이 뾰쪽해지그든. 그러고 그것이 모감지를 팍 숙임시로 땅을 파고 들어가서는, 바로 그 자리서 땅콩이 생긴단 말이여. 그래서 땅에서 나는 콩이락 해서, '땅콩'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여어."

"아!......"

"세상의 모든 콩이 배까테서 열리는 디, 오직 땅콩만 땅속에서 생긴다 그 말이그든. 그러고 땅콩이란 말을 한자로 쓰먼, '낙화생(落花生)'이라고 허는 디. 떨어질 낙 자에 꽃 화 자...그래서 '꽃이 떨어져 갖고, 그 자리서 생개났다'라는 뜻인 게, 참 과학적인 말인 셈이지야. 그래서 꽃이 을마나 피었는가를 보먼, 장차 수확이 을마나 될지를 미리 아는 것이여어."

그러나 아이들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지 않았다.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맛을 본 뒤로, 아이들은 그 강렬한 유혹에 흐느적거렸다. 그리하여 중국 사람들과 아이들 사이에는 늘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던 바, 이에 대해 김씨는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속아지 웂는 놈들. 남의 것 돌라 먹으먼 배가 불르기를 허냐, 살로 가기를 허냐? 가슴이 통게통게 해 갖고, 앨라 먹다가 찌로 가기나 허겄다. 실큰 먹어봤자, 맻 개 주서 먹다가 말람시로, 뭇헐라 다른 사람 일 년 농사를 망치끄나 이. 하니나, 너는 그러지 말어라. 정 먹고 싶으먼, 조심조심 들어가서 한두 뿌리 캐다가 먹으먼 될 것을, 온 밭을 쓸고 댕긴 게 주인이 을마나 속이 상허겄냐? 썩을 놈들, 다리 몽데이를 뿐질러 놓든지 해야제에..."

"어메. 석형이랑, 영구랑, 기중이랑은 은젠가 딜캐 갖고, 쇠똥이한테 허벌나게 맞었다네. 군밤을 을마나 맞었든고, 대갈통에 남북이 나 갖고 요로코 부섰단 게는..."

"썩을 놈들. 설쳤다 설쳤어. 그만헌 게 다행이제, 즈그 놈덜, 그러다가 형무소라도 가먼 어찔라고 그러끄나 이."

"...그런 게."

김씨의 '공갈 협박'과 스스로의 유약(柔弱)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태민은 '공격조'의 대열에 끼지 못했다. 그나마 딱 한 번, 서리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수많은 망설임과 아이들의 부단한 부추김이 있고 난 후였으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쏟아지는 비로 인하여 사방은 새벽처럼 어슴푸레했고, 빗방울을 맞을 때마다 팔에 소름이 돋을 만큼 기온은 뚝 떨어져 있었다. 앞집 막둥이인 석형, 염전 인부의 아들 광호, 그리고 쇠꼴을 놓고 벌이는 낫치기에서 발군(拔群)의 실력을 발휘하는 기중이와 태민, 이렇게 모두 넷이었다. 빗줄기 사이로 땅콩집이 희끄무레하게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기중이 침묵을 깼다.

"야! 느그덜 땅콩 안 먹을래?"

"..........???"

나머지 셋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껏 구미가 당겼지만, 늘 길선이라고 하는 '독종'이 문제였다. 발이 빠르기로 소문난 사내. 그는 여럿이서 땅콩을 캐 먹다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더라도, 한 아이만 지정하여 끝까지 추적하는 잔인한 근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생포된 '도둑'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은 다음, 커다란 창고에 감금되었다. 몇날 며칠 갇혀있다 보면 동네와 학교에까지 소문이 나기 마련이고, 풀려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피도, 눈물도, 인정도 기대할 수 없는 그에 대해 아이들은 '지옥에서 온 사자'나, '머리에 뿔이 열두 개쯤 달린 도깨비' 이상의 존재로 상상했다. 때문에 나머지 셋은 여전히 망설였고, 기중은 속이 타는 눈치였다. 마침내 그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느그 씨벌 놈들, 나한테 땅콩 주락 허먼, 귓방매이를 부쳐 버린다 이."

최후통첩을 고한 그는 야트막한 탱자 가시덤불을 훌쩍 뛰어넘었다. 밭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쇠스랑으로 캐내어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넝쿨들에서 부리나케 땅콩을 따기 시작했으니. 시범을 보이는 듯한 그의 현란한 손놀림, 가을비에 씻겨 하얀색으로 분칠한 알맹이들은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욕망을 동시에 불어넣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두 녀석이 뛰어들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하나 뿐.

"야, 이태민. 너 혼자 뭇허고 자빠졌냐? 빨리 들어와야."

녀석들의 재촉이 못내 부담스러웠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안, 기중은 전리품을 가득 안은 채 무사히 귀환하고 말았다. 불룩해진 바지 호주머니와 주렁주렁 두 손에 들린 소담스런 열매들을 보는 순간, 눈알이 뒤집혔다. 아! 악행(惡行)도 얼마든지 성공하는구나.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눈을 딱 감은 채 뛰어들었다. 먹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소심한 아이'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성취감과 불안이 교차하며 온몸의 진동이 손으로 전달되어왔다. 그 떨림을 감추고자 바지런히 손을 놀렸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무아지경,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그 자리에 타인이 들어선 것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나 꿈틀거렸을까. 흐느적거리는 그 시간이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숨 막히는 시간의 흐름을 끊고자 허리를 펴는 찰나, 꿈결에서처럼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길서이다. 아그덜아! 내빼야. 내빼..."

아! 이 무슨 날벼락인가?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작년 겨울. 전국순회공연을 한다는 풍물패가 서촌의 한 공터에 차일을 치고, 입장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개구쟁이들은 으슥한 지점의 차일을 골라 개구멍을 만들었고, 그곳으로 한 사람씩 뛰어들기 시작했다. 역시 마지막 남은 주자 태민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두 눈 딱 감고 뛰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락없이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왜 이 순간,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걸까. 아!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기중은 칠산 바다 쪽으로, 석형과 광호는 학교 쪽, 즉 서촌의 반대방향을 향해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민은 제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발이 떼어지질 않았다. 절망과 분노의 심정으로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땅콩을 몽땅 꺼내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비몽사몽간에 두어 걸음 옮기다가, 탱자나무에 걸려 엎어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한 중에 공중 위에는 환상인 양, 길선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너 임마! 누가 남의 땅콩, 캐 먹으라고 했어?"

".........."

거짓말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의리를 내팽개치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 녀석들이 얄미워서였는지, 재수에 옴 붙은 자신의 운명이 야속해서였는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절대로 공범을 발설하지는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정수리를 때리는 빗줄기에 섞여 눈물은 희석되었으나, 그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너, 이회장님 아들이지?"

".........."

기성 회장의 아들이 땅콩서리에 가담하면 되겠느냐는, 실로 준열한 심판이었다. 하지만 태민의 귀에는 그것이 구원의 음성으로 들렸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난 데 대한 불편한 심기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 때문에 무사히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일었던 것이다.

"앞으로 그러지 말어라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아름다운 말, 용서의 언어가 귓전을 때렸다. 세월이 흘러 길선이가 머슴으로 들어 왔을 때, 바로 이때의 인연이 늘 가슴에 남아있었는지도 모른다.


땅콩집은 서촌과 학교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넓은 뜰 한복판에 지어진 독립가옥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외로운 섬 같아 보였다. 헐값에 사들인 모래땅에 땅콩을 재배하기 시작한 중국 사람들은 무라리 사람들이 모르는 신(新) 기술로 적잖은 소득을 올리다가, 어느새 막강한 돈의 위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봄에는 씨를 뿌린다며 시끌벅적대다가, 가을철이 되면 땅콩 껍질을 까야 한다며 동네 처녀와 아낙네들을 '싹쓸이'로 불러들였다. 커다란 대문을 들락거리는 수십 명의 여인들을 바라보며, 태민은 일제 때에 공출되어 갔다는 처녀들을 떠올렸다. 작업장은 아이들에게 늘 공포의 대상이었던 창고. 땅콩을 캐 먹다가 들킨 아이들이 실컷 두들겨 맞은 다음, 밤새워 갇혀있는 곳. 언젠가 기중은 그 안에서 보낸 밤에 대해 진저리를 친 적이 있었다.

"씨벌! 거그 들어가먼, 꼭 형무소에 온 것 같어야. 오살나게 캄캄허기는 헌 디, 좇나게 추와 갖고는 이빨이 우 아래로 딱딱 부닥친단 게. 그러고 쪼까 있은 게, 쥐새끼들이 막 돌아 댕기는 디, 진짜 미치고 뽈딱 뛰겄드라. 밥도 안 준 게, 쫄딱 굶고..."

"땅콩이라도 맘대로 먹제, 그랬냐?"

"너도 느자구 웂는 소리 허고 있다 이. 암 것도 안 보이는 다다가, 누가 알 땅콩을 거그다 놔 두간디? 씨벌! 손때 할라 매운 쇠똥이 새끼한테 허벌 창나게 맞어버렀다. 여그 청개나고 남북 나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꾀 많은 녀석이 그 속에서 실컷 땅콩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자만 그 맛을 즐기기 위해 우리에게 비밀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어떻든 그 집이 무섭고도 음침한 곳으로 각인된 까닭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품성 때문이기도 했다. 길선 외에도, 별 희한한 족속이 다 운집해 있었던 바, 쇠똥이 역시 그 명물 중 하나.

혹시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것이 아닐까 의심될 만큼, 그의 몸은 검었다. 유난히 하얀 이를 빼 놓고는, 얼굴이며 손발 등 몸 전체가 먹물을 끼얹어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크고 투박한 얼굴에는 몸집 큰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함이 배어 있었고,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달리 행동거지에는 어수룩한 구석이 있었다.

어느 봄날 오후. 이부수업이 들어 있어 느릿느릿 걸어가던 태민은 위통을 벗어젖힌 채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밭 가운데에 누워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풍만한 육체의 모래덩이 '미녀'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는 실제 크기와 똑같은 여자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아이들을 향해 히죽히죽 웃어댔다. 여자아이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면 힘껏 껴안는 시늉을 했고, 심지어 배 위에 올라가서 '그 짓'을 흉내 내 보이기도 했다. 코밑에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나기 시작한 그는, 용솟음치는 봄날의 정욕, 춘정(春情)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혀를 차며 지나가거나, 아예 고개를 돌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감히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태민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와 모래덩이를 번갈아 쳐다보자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개새끼같이. 씨벌 놈.'

까닭 모를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머리가 아프고 뱃속이 메스꺼웠다. 절망감이 엄습해 오면서 화가 났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한밤중 인기척에 잠을 깬 적이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바로 앞, 어둠 속에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엄마? 엄마! 그러나 손에 잡힌 건 뜻밖에도 건장한 남자의 가슴. '그'는 갑자기 오강에 걸터앉아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여름 소나기처럼, 계곡의 폭포수처럼 요란했다. 여자의 흉내를 내보려다가 실패한 그는 문을 박차고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엄마!"

가겟방에서 이씨가 뛰어나갔지만, 그의 흔적은 사라진 뒤. 이튿날 김씨는 다짜고짜 금자를 쥐어박았다.

"아이고! 인자 애리디 애린 년이 남자를 불래 들애야? 에라이! 이 년아. 디져라 디져."

그는 도둑놈이 아니라 금자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아! 성(性)이란 그토록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더러운 거로구나.'

마음속을 가득 채운 갈등으로 며칠을 끙끙 앓다가, 결국 김씨 앞에서 말을 끄집어냈다.

"쇠똥이가 문 여자를 만들어 갖고는, 그 새끼가..."

"...! 나도 다 들었다. 막돼먹은 놈인 게, 하니나 그쪽은 쳐다보지도 말어라. 글 안 해도, 으런들이 입맛을 따셔 쌌드라. 하이고! 어찔라고 그런 종자들이 여그까지 들어와 갖고는..."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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