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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04. 2016

최영묵이 다시 읽은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글과 삶


2015년 12월 5일은 리영희 선생 타계 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리영희는 지난 50여 년간 한국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단순히 ‘언론인’이라는 명칭만으로는 그가 한국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신경림 시인은 리영희의 말과 글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말은 매운 높새바람이다. (줄임) 이 땅의 잘난 온갖 것들을 허수아비로 나뒹굴게 만드는 그의 말은 칼날보다 더 매서운 된마파람이다.”


연합통신사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해직됐고, 이후 한양대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 어느 위치에서든 정론직필의 글쓰기로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다. 1970년대 대학을 다닌 지식인 세대들은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일깨워준 그의 지적 단비의 수혜자들이었고, 1980~1990년대 학번은 북핵문제와 한반도 정세에 관한 그의 치밀하고 냉철한 분석으로 분단의 현실에 눈을 떴다. 리영희는 이런 사상의 은사로 여겨지지만, 한 치의 현학, 도그마도 발견할 수 없는 지식인이었다.

리영희 선생의 타계 전후로 선생의 전집, 평전, 자전적 글들이 여럿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비판과 정명 - 리영희의 언론 사상>이란 책을 낸 성공회대 최영묵 교수는 이러한 리영희의 삶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다시 들여다볼 필요성을 역설한다. 리영희의 제자이자 ‘게이트키퍼’로서 “오래 묵은 방세를 정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그를 만났다.

Q 리영희 선생의 생애와 사상은 생전의 대담집이나 평전을 통해 접할 수 있는데요, 또 달리 이 책을 집필하시게 된 계기나 방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생전에 집필된 리영희 선생의 자전적 글이 <역정 - 나의 청년시대>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두 권 있고요, 다른 분이 리영희의 삶을 기록한 책도 세 권 정도 있지요. <역정>은 선생이 35세 무렵 자신의 삶을 기록한 글로, 험난했던 삶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이야기 중심이 청년시절이라 언론인으로서 삶을 시작하기 직전에 끝나요. 또 2005년에 나온 <대화>는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가 회복된 후 한길사에서 일련의 기획출판으로 마련한 임헌영 선생과의 대담집이지요. 아무래도 대담 형식이다 보니 대담자가 설정한 프레임이 상당히 작용하기도 했고 특정 부분이 강조되기도 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책들은 리영희 텍스트에 대한 맥락이 있을 뿐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지요. 이 외에도 리영희 선생의 평전 형식의 책도 세 권 정도 되는데요. 일단 강준만 선생이 쓴 <리영희 -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2004)는 리 선생이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엮은 것이고, 김만수 박사의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2003)는 리 선생의 글들을 저자가 열심히 분석했지만, 인간 리영희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지요. 김삼웅씨의 평전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2010) 또한 사건 중심적이고 리 선생의 글을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선생의 삶을 전달하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니 리영희라는 인간과 그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저술이 같이 고민된 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리영희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리영희의 글인데, 전집이 나왔다고 해도 리영희 글에 대한 제대로 된 정리, 엄밀한 고찰이 여전히 부족한 상태거든요. 리영희 선생이 <역정> 서문에 “혁명가는 지나온 혁명이 그 인간의 전기다. (줄임)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의 글이 자신이 말하는 전부다”라고 쓰셨듯이, 리영희의 전기적 기록과 삶의 평가는 리영희의 글들에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리영희의 텍스트에 좀 더 천착하는 가운데 이를 동시대의 역사적 흐름, 리영희의 삶과 연결시켜 고찰해보고자 하는 거였지요.

Q 책의 제목을 ‘비판(批判)과 정명(正名)’이라고 붙이면서, 리영희 선생이 언론인으로 수행한 일이 바로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제일 고민했던 부분이 ‘리영희 선생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였어요. 저는 리영희의 삶과 그의 언론사상을 ‘비판’과 ‘정명’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분은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 50여 년간 오로지 글을 쓴 언론인이었거든요. 선생은 늘 글을 쓰는 이유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서문에도 썼듯이, 비판은 진실을 밝히는 우상이나 허위의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며 그 출발점은 “그것은 허위다”라고 외치는 것이지요. 선생이 처음 쓰신 글이 차후 <전환시대의 논리> 권두 논문으로 실린 ‘강요된 권위와 언론 자유’였어요. 권위가 강요되고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 맞서야 하는 지식인의 책임을 이야기하고 싶으신 거였지요. 그런 현실 비판, 지식인 비판이 선생의 글쓰기의 바탕이자 동력, 그리고 정당성이지요.

‘정명’은 사물과 사상(事象)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인데, 리영희 선생의 글쓰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에요. 선생은 늘 구체적인 말의 의미부터 규명하고 말을 바로잡고 들어가거든요.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쓰셨듯이, 사상은 언어를 통해 전달되기에 우리의 세계관이 냉전 용어에 의해 형성되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사유체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선생은 그래서 ‘북괴’나 ‘중공’과 같은 냉전 체제의 용어들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셨지요.

제가 책에서 이러한 선생의 ‘정명’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이야기했어요. 첫째로는 이름과 실상을 일치시키는 일, 둘째로는 자기 명분에 해당하는 덕을 실현하는 일, 그리고 세 번째로 이를 바로잡는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일이지요. 이렇게 정명은 우상이나 허위에 가려진 사회적 실체를 바로 세우는 일이면서 실천적 측면까지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리영희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두 단어 '비판'과 '정명'

Q 유시민, 조희연, 강준만 등 이 시대의 진보 지식인들이 거의 모두 리영희 선생의 사상에 영향 받은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특히 리영희 선생께 받은 영향이나 개인적인 인연 등이 궁금합니다.

제가 서문에서 오래 묵은 ‘방세’를 정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는데요. 저는 10년 가까이 리영희 선생의 연구실 조교였습니다. 1984년 복직하신 후 선생은 1986년경부터 일본, 미국 등에 교환교수로 나가시게 됐는데, 그 때부터 제가 선생님 연구실을 쓰며 선생님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했지요. 한국에 들어오시고 나서도 늘 한양대 연구실보다는 자택에서 주로 작업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연구실을 쓰면서 전화 심부름, 인터뷰나 원고청탁, 주례 청탁 등을 조율하곤 했지요. 그런 선생 덕에 차후 많은 인맥도 얻고 공부도 했지만, 사실 선생의 저술들에 대해서 제대로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리영희 선생 타계 1주기에 ‘창작과비평’에서 선생에 관한 좀 긴 글을 청탁해왔어요. 가볍게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선생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거예요. 물론 글들은 예전에 읽었지만, 선생의 글이나 인생을 단편적으로만 알지, 선생의 인생을 좌우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총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거지요. 그래서 전집을 열심히 읽어봤는데, 교정이나 역주가 부족하고, 글에 대한 철저한 고증도 안 되어 있는 거예요. <리영희저작집 2 - 우상과 이성>의 경우는 1977년 초판이 아니라, ‘검열삭제판’만을 (그것도 또 개정해서) 실어놓아서 당시 선생의 글에서 무엇이 문제적이어서 무엇을 삭제했어야 했는지 전혀 복원되지 않았더라고요.

주섬주섬 그 글을 쓰고 나서 좀 반성이 됐어요. 그래도 제가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한 사람인데 말이지요. 제가 언론학자니까 다른 건 몰라도 선생의 언론사상과 관련해서는 정리를 해보자고 이 책을 쓰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선생의 언론사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평생 애쓴 우상 타파, 이데올로기 비판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Q 책을 쓰시면서 리영희 선생에 대한 기억, 감회가 새로우셨을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선생은 학문에 대해선 엄격하시지만, 한번 신뢰를 쌓은 주변 사람들에겐 다 맡기시고 무척 소탈하셨어요. 선생님은 웬만한 원고 청탁이나 주례 청탁에 대해 제게 그냥 판단을 맡기셨어요. 제가 10년간 선생님의 조교로, 게이트키퍼로 참 편하게 지냈지요. 게다가 무시무시한 리영희 선생의 조교니까 학교에서도 아무도 저를 안 건드렸지요.(웃음)

1993년엔가 좌골신경통으로 쓰러지셔서 갑자기 강의를 못하게 되시니까 제가 대리로 수업을 들어가야 했어요. 그런데 뭐 어떻게 하란 말씀도 안 하세요. “강의는 네가 알아서 해라. 단 정장 입고 들어가라.” 그러는 분이셨지요. 한번은 벌초를 하러 가시는데 저나 학생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으시고, 학교에 구인광고를 내셨어요. 권력의 억압에는 철저히 저항하시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굉장히 자상하고 소탈하신 분이셨지요. 단, 선생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성실함이 요구됐지요. 인터뷰 요청도 당신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현학적이고 잘난 척만 한다 싶으면 딱 거절하는 분이셨어요.

Q 리영희 선생님의 저술이 민주화운동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대학 때 접한 세대인데, 그때도 선생의 글은 1990년대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게 하는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선생의 사상과 글이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좀 나눠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한국 지식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게 1970년대 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때 글의 초점은 베트남 전쟁이나 미국의 펜타곤 페이퍼 관련한 것이었는데, 이런 글들이 베스트셀러가 됐지요. <전환시대의 논리>가 1970년대만 해서 1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상과 이성>이 1980년대까지 7만3천 부가량 나갔어요.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 규모가 작았다는 걸 고려하면,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는 거죠.

조희연 선생이나 김동춘 선생 같은 세대들은 유신시대에 이런 금서를 몰래 숨겨놓고 본 세대지요. 그때 그렇게 이불 속에 숨어서 이 책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지요. 왜냐면 1960년대 내내 대한민국을 뒤흔든 것이 바로 베트남 파병이었고, 한국 사람에게 베트남 전쟁은 반공성전이었지요. 그런데 리 선생이 베트남 전쟁의 진실,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은 반공성전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베트남 전 인민의 민족적 항전이라고 이야기하고, 그게 아주 디테일한 사실관계에 기반해 정리되어 있으니까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또 당시 선생의 관심사는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사회주의를 통한 제3의 길 모색이었거든요. 중국 사회주의가 급속하게 팽창하고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데, 선생의 책에서 제3의 길로서 중국의 실험을 이야기하니, 유신 독재 속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지식인들은 지적해방의 단비를 맞은 것 같았지요. 우리도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지요. 리영희 글의 영향력이 엄청났던 시기는 1970년대였어요. 1980년대 이후에는 전두환 정권의 유화정책으로 금서들이 해금되거든요. 1980년대 후반 학번부터는 사회주의 진영의 원서까지도 볼 수 있는 여건이었기 때문에, 리영희의 책이 1970년대 선배들한테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지요.

1990년대 이후 선생이 미쳤던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1994년에 북핵문제가 발생하고 한반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던 당시 여건이 컸다고 할 수 있지요. 1980년대부터 선생이 치밀하게 조사해오던 것들, 즉 한반도를 둘러싼 핵문제나 남북한 군사력, NLL과 관련한 집중적인 연구들이 섭렵됐던 것이지요. 또 독일 통일 후 한반도에서도 통일 논의가 활성화돼서 한반도 반전평화에 대한 선생의 디테일한 논의들이 활성화되었지요. 사실 선생은 실향민이고 애초부터 남북문제나 통일에 관심이 지대했지만 그 전까지는 한국 정세, 특히 통일문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할 수가 없었어요. 1960년대만 해도 통일 논의는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이야기였던 거지요.



"모든 것에 인간이 중심 돼야 한다는 신념... 휴머니스트 리영희"

Q 리영희 하면 통일운동가, 혹은 민족주의자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휴머니스트다. 인도주의자 그리고 평화주의자이고, 덧붙이자면 우상파괴자!”라고 말한 적이 있으시지요. 리영희의 휴머니즘은 어떤 면모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보시는지요? 

리영희 선생은 실상 ○○주의라는 것을 혐오했어요. 그러한 것이 도그마적이고 어떤 특정한 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규정성을 띠고 있어서 자유로운 생각을 막는다고 보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한 인터뷰에서 박노자씨가 “당신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 그런 대답을 하신 거지요. 선생은 자신이 그냥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또 생각이란 다양하게 발전해가는 것인데, ○○주의라는 이념은 그걸 묶어둔다고 보고 거부하신 겁니다. 사실 휴머니즘이라기보다 선생은 그저 모든 것에 인간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신 것이지요.

그런 면모는 <스핑크스의 코>에서 잘 드러나요. 거기서 선생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종교를 말하고, 인간을 위해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시지요. 배타성이나 추상적 가치에 집착하는 것에 반대했고, 종교는 인간 자체를, 그리고 영혼이 아닌 현세의 육체적인 것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또 선생은 1960년대 베트남 민중을 생각하며 단 하루도 편히 잠든 날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떠오릅니다. 정년퇴임 이후에는 몸이 불편하신 상황에서도 장애인 차량 운전법을 배우시면서,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구속, 그리고 수십 번 압수수색을 당하는 삶을 같이해온 아내를 위해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생각나네요.

그런 인간에 대한 마음이 리영희의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리영희를 딱히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라고 봅니다. 선생은 민족을 사랑하는 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보다 가장 민족을 우선시하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가령 선생은 반일감정을 앞세워 한일전이라면 무조건 흥분하는 것을 잘못된 민족주의라고 보셨어요. 그래도 선생을 민족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가 사는 곳이 여기니까 이 민족의 고통을 중시 여기는 것이지 민족이란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는 태도는 아닌 것이지요.

Q 리영희 선생님의 사상과 실천이 오늘날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오히려 반문하고 싶어요. ‘리영희 선생의 사상이 과연 오늘날에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선생이 쓰신 글들을 지금 읽어봐도 시의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거든요. 워낙 철저한 사실자료들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생이 지적한 본질들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최근 데이터를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을 뿐이지, 그것이 지나간 구태한 문제가 된 것은 전혀 아니지요. 리영희 이후 해외 정세나 남북관계, 사회적 현실에 대해 많은 정보로 넘쳐나지만 사실 문제의 초점은 희미해지고 예각 없이 두루뭉술해졌습니다. 그래서 리영희의 글을 좀 읽어보고 이야기하자고 하고 싶었고, 그게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것은 ‘방법으로서의 리영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의식화의 영웅이라고 말하는데, 그 리영희의 사상과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요. 깨어 있는 지식인, 늘 현장으로 가는 사람, 그것도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전략적인 현장주의자의 면모, 결코 하나에 빠져들지 않는 경계인으로서의 자세. 이러한 가치는 특정시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될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리 선생은 마지막 저서인 <대화> 서문에서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는데 여러분이라면 전쟁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생각해보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세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걸 생각해보기를 촉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리영희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지식인은 교양인이고 독서인이다. 나아가 스스로 무지와 몽매에서 벗어나 실천하는 자유인이다”라고 늘 강조하셨어요. 이 책을 통해 인간 리영희와 만나면서,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사진 : 신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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