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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08. 2016

꿈꾸는 시인 김경주 "늘 독자를 배신하기 위해 궁리"



시인 김경주는 시만 쓰지 않는다. 그의 이력에는 시집이 아닌 책들이 더 많은 자리를 꿰차고 있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시인으로 정점에 올라 있으면서도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 오를 곳이 없어 보일 때에도 자신만의 사다리를 가져와 더 높은 꼭대기에 오른다. 그리고는 쉴 새 없이 많은 일들을 벌인다. 강단에 이어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각종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전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새로운 얼굴을 하고 나타난 그를 마주했을 때, 곧장 이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거예요?” 

평소 시집을 즐겨 읽지 않더라도, 문학에 별다른 관심이 없을지라도 김경주 시인의 이름은 결코 낯설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대형서점의 문학 서가에는 언제나 그의 시집들이 베스트셀러에 머물러 있고, 소위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있어 김경주 시인의 책은 일종의 교본처럼 통할 정도이니까. 올해로 마흔하나. 2003년 등단 이후, 그는 시집 네 권을 비롯해 스무 권이 넘는 책을 냈다.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넘어 이제는 오늘날 한국시의 대명사로도 통한다. 이제껏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방면에서 자신만의 숨결과 목소리를 키우며 더욱 높이 도약해온 그다.

늘 새로운 행보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그이지만, 새로이 동화책을 들고 나타났을 때 당혹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삶의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비딱한 자세로 선뜩한 말들을 꺼내놓아야 할 시인에게 동화라니. 손쉽게 비유하자면 독한 술의 보드카와 달짝지근한 맛의 요구르트를 함께 맞닥뜨린 느낌이랄까. 언뜻 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나무 위의 고래>는 김경주 시인의 감수성을 녹여낸 어른용 동화다. 버려진 보트 속으로 들어가 사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독백의 형식으로 펼쳐나가는 책이다. 독백이라는 뜻의 모놀로그를 변형해 ‘모노동화’라는 새로운 형식을 구축한 작품이다. SNS를 통해 수많은 고백이 범람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짜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낯선 고백으로부터 시작된 어른들의 감성동화

한 대학에서 막 강의를 마치고 왔다는 그에게 “바쁘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을 넌지시 던지자 그는 “웃기는 인간이라는 소문이 나야 할 텐데”라는 대답을 하며 멋쩍어 했다. 시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을까. 다소 과묵하거나 무거운 분위기의 인터뷰가 진행될 거라 예상했지만 그와 대화를 펼치는 내내 이런저런 웃음과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답하는 얼굴에서는 사뭇 진지한 태도가 엿보였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복구 현장을 보게 됐어요. 최고급 요트가 파도에 쓸려와 숲에 처박혀 있더군요. 폐허로 변해버린 그곳에서 마을 어른들은 뭐 하나라도 건져볼까 복구작업을 펼치는데 아이들은 누군가 버리고 간 요트를 아지트 삼아 놀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무 위에 살고 있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죠. 아시겠지만 우리 사회의 기상 역시 악천후잖아요. 아직까지 물속에 가라앉은 아이들이 있고요.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치유와 위로가 될 만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는 이 책을 어디서 왔고 어디에 머무르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여정의 서사’로 설명했다. 주인공이 ‘바람’, ‘윤리 선생님’, ‘낙타’, ‘부리갈매기’, ‘형이상학자’, ‘죽음’ 등 다양한 존재와 관계를 맺는 여행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앞서 설명한 존재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모두 자기고백을 한다는 점이다. <나무 위의 고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경주 시인은 고백과 기도라고 답했다.

“자기고백이 없는 삶은 시체 같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기도는 신과 관계 맺으면서 자신이 약하고 불안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책의 제목으로도 쓰인 고래는 김경주 시인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존재였을까. 해군에 복무하던 시절, 그는 군함을 타고 다니면서 많은 고래를 관찰했다. 깊고 차가운 해저에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와서 뜨거운 숨을 내뿜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치 물속에 있는 거대한 섬이나 하나의 식물처럼 느껴졌다. 결국 김경주 시인은 고래에게 영감을 받은 세 개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다. 2014년에 나온 시집 <고래와 수증기>가 그 첫 번째 작업이고, 이번에 나온 <나무 위의 고래>가 두 번째, 2016년에는 곧 세 번째 작업이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동화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막상 써보라고 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도요. 쓰면서 자꾸 작가의 시선으로 아이를 대하기 때문이죠. 아이를 위한 동화를 썼다면 저 역시 실패했을 거예요. 주인공이 조숙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이게 진짜 오늘날의 아이들이라고 봐요. 사실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천진난만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고 있거든요.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코끼리가 될 거야’, ‘방울토마토가 될래’라고 얘기하다가도 지렁이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거나 병아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에 날려버리죠. 제 생각에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아이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 같아요.”  

<나무 위의 고래> 속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바로 ‘진실’이다. 김경주 시인이 세상의 진실을 대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그는 보편적 진실보다 상대적 진실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문학에서만큼은 ‘1+1=3’이 될 수 있다는 개별적 진실을 옹호할 수 있어야 해요. 이걸 설득할 수 있어야 문학이 될 수 있거든요.”

한편, 그는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비밀’을 강조하기도 했다. 진실과 비밀이라니.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작가의 뻔뻔함(?)이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저는 비밀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시인 이상은 ‘비밀이 없는 자는 가난하다’고 말하기도 했죠. 인간에게는 비밀이 있어야 해요. 여기서 비밀이란 은유와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우리가 동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 안에 비밀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동화책을 보다가 스르르 잠들었던 순간까지도 따라왔던 비밀. 그 호기심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악천후를 벗어나게 하는 한줄기의 치유와 위로 

‘철이 든다’는 말에서 그 ‘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학과를 갔다는 김경주 시인. 광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기계체조를 하며 엘리트 운동선수의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이른 나이에 좌절을 맛본 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살인 빼고 다 해봤다. 동네 양아치였다.”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담배부터 술, 본드까지 손댔다. 군에 입대할 때에도 부모님께 슈퍼마켓에 우유를 사러 간다고 말하며 홀연히 떠났던 그였다. 무엇으로 보나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이었다. 그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수치심과 죄의식과 허영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스물일곱의 나이, 오랜 방황 끝에 서강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주변 친구들은 전부 영화나 음악에만 심취해있었다. 당시만 해도 박찬욱 감독이 만든 영화 동아리와 가수 신해철의 음악 밴드가 큰 영향력을 차지했다. 연극과 시에 빠져 있던 김경주 시인은 대학에서 문제적 인물로도 통했다. 학비를 마련하던 중 사채업자가 학교를 쫓아온 탓에 강의실 창문으로 도망가기도 반복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유명인들의 자서전을 대필하며 ‘야설’ 작가로 나서기도 했다.

결국 이런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김경주 시인은 전날 밤 쓴 시를 늘 가슴 속에 품고 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문득 외로워질 때면 지하철에 올라 옆에 앉은 이에게 가슴에 품어두었던 시를 꺼내어 읽어주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14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시를 읊기도 했다. 당시 114에 전화를 걸었던 일화는 훗날 ‘114를 누르며’라는 연극 작품으로 만들어져 실제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뻔뻔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김경주 시인의 녹록지 않았던 삶을 조금씩 들여다보니 <나무 위의 고래>에 등장하는 형이상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형이상학자는 동화 속 주인공에게 “사는 건 조금씩 더 불행해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산다는 일은 살아온 만큼 조금씩 사라지는 일이라 생각해요. 제게 글을 쓰는 일은 행복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식 같기도 하고요. 저는 건망증이 심해요. 갚았던 돈을 또 갚는 식으로 건망증이 심한 사람을 좋아하고요.(웃음) 사실 이게 제가 지향하는 삶의 관계인데, 느슨한 형태의 연대감이랄까요? 이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보면 사람들과 만났다가 금방 헤어지거든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고요.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연날리기를 처음으로 가르쳐주셨을 때의 기억이 선명해요. 연을 날리다 보면 어느 순간 연이 안 보이는 때가 오는데 내 손과 연은 끊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이어져 있거든요. 이처럼 우리 삶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그렇게 미묘하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동화 속의 주인공과 인물들 사이에서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그는 새로운 책을 낼 때마다 늘 기존의 독자를 배신하기 위해 궁리한다고 했다.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인해 독자를 찾아가는 서비스(?)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뻔해져가는 것들에 당당히 뻔뻔함을 들이밀며 자신만의 신경질을 잃지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이번 모노동화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젊은 감성의 시인과 소설가의 이야기로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조만간 뮤지컬 버전의 <나무 위의 고래>도 만나볼 수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그의 말이 가슴 한편에서 맴돌았다.

“어른들이 말하는 쓸모 있는 짓을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남들이 쓸모없다고 할지라도 무엇 하나를 좋아해서 계속 하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에 닿을 수 있게 되요.”

<나무 위의 고래>는 진실과 비밀과 침묵과 시적인 긴장감이 저마다의 질감과 다양한 결로 살아 숨 쉬는 책이다. 김경주 시인만이 줄 수 있는 이 동화적 감동을 부디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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