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충격의 여름방학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 진선과의 만남은 계절만큼이나 무르익어 있었다. 다만 큰방 아주머니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진선의 큰방 어른들이 보내는 눈치 때문에 거처를 옮겼을 뿐이다. 태민의 하숙집은 학교 앞의 우산동 언덕배기에 자리해 있었고, 진선은 사흘이 멀다 꽃을 사 들고 이곳을 찾았었다. 몸집이 뚱뚱한 주인아주머니는 이전 하숙집 여자처럼 '학생 부모님을 생각하여 열심히 공부하라'거나 진선의 큰방 사람들처럼 ‘모름지기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등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학가에서는 종종 데모가 일었고, 동아일보의 광고가 중단되는 사태도 있었다. 하지만 고3 수험생, 특히 진선과의 사랑에 푹 빠진 태민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넉넉한 표정으로 둘 사이를 지지해 주는 하숙집 아주머니, ‘동아일보에 성금을 보내야 한다!’고 열을 올리다가도 둘을 볼 때마다 '결혼하여 애기 많이 낳으라!'는 덕담(?)을 빼먹지 않는 옆방의 키 작은 아저씨, 승진 시험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는 육군 대위, 그들이 고마울 뿐이었다. 다만 ‘나도 옛날에 연애를 해 보았는데, 헤어진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서)낳은 아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는 옆방 아저씨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긴 했지만.
예비고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당에 본고사가 발등의 불로 등장했고, 만약 이 일에 실패하는 날이면 온통 진선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갈 판. 마침 친구 녀석의 권고도 있고 하여, 전일학원 55일 코스에 들어갔었다. 고등학교 3년 전체 과정을 55일 만에 마스터해 준다니, 지지부진한 학교 수업을 보충하기에는 안성맞춤일 터. 그리하여 만일 오늘 합격 소식을 듣는다면, 그 친구의 공로 역시 작지 않으리라 여기는 중이었다.
난로에서는 톱밥 타는 소리가 요란하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담뱃불을 끈 다음, 벌떡 일어섰다. 이리저리 걸어 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이 모양을 바라보던 여자아이가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가 버린다. 손님이라곤 딱 한 사람, 달리 할 일도 없을 터.
'오전 열 시에 발표가 있다고 했으니, 지금쯤 결과가 나왔을 텐데. 제대로 찾아가긴 했을까? 혹시 내 명단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천국에로의 초대장이냐 아니면 지옥에로의 소환장이냐? 모든 신들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합격의 소식을 전해 듣고 싶었다. 진선! 그녀가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천사이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기실 나 못지않게 긴장하고 있는 쪽은 그녀 쪽일지도 모른다. 낙방하는 데 일조(一助)했다는 욕을 먹는 일이 죽기보다 싫을 터인즉.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바빴던 시간들을 벼락치기 공부로 메울 수 있었기를. 그래. 이번에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유 한 잔을 마신 후, 엽차만 벌써 석 잔째. 난로 위에 얹어진 주전자의 물을 스스로 따라 마셨다. 단골손님인지라 싫은 내색조차 할 수 없는 여주인의 입장을 생각하여 셀프서비스 중. 아니야. 일생일대 중요한 순간에 이까짓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면 안 돼.
자신의 소심함이 늘 불편했었다.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 고사장의 환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다른 아이들의 시선 때문에 정신 집중이 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성벽(性癖)도 생각해 보면 참 속 상할 일이었다. 이씨 역시 그러한 태민을 두고 여러 차례 혀를 찼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만일 내가 대학생이 된다면, 머리를 기르고 멋진 양복을 하나 맞출 거다. 그리고 극장이나 다방에도 실컷 가 보고...'
아니 이놈아! 그건 합격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미리부터 김칫국 마시기는. 연거푸 물을 마셔 댔다. 아마 내 눈은 충혈 되었을 테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그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눈길 앞에 긴 머리 소녀가 하나 나타났다.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느라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아! 오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면 그렇지. 내 복에 무슨. 애당초 기대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항상 그 못난 미련이 문제라니까.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입술을 바라보았다.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녀가 싱긋 웃었다. 저 웃음이 의미하는 것은? 합격? 설마. 그렇다면 낙방에 대한 위로?
"축하해!"
잡다한 생각들을 단번에 몰아내 버린, 그 한마디. 차라리 그것은 허탈감이었다. 썰물처럼 온몸으로부터 힘이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삶의 희열. 그건 정녕 충격적인 기쁨이었다. 아!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다니. 어떻게 내 인생에 있어 합격소식을 듣는 날이 올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내 삶에 있어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질 수 있단 말인가? 정녕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진정 오보(誤報)는 아니겠지?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제과점 여주인이 웃었는지 찡그렸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문을 나서자 함박눈이 환호하고 있었다.
"야호!"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몸은 스스로 공중을 향해 솟아올랐다. 아! 합격자의 심정이 이런 거로구나. 승리의 기쁨이 이런 거로구나.
"그러다 넘어져요. 그렇게 좋아요?"
"좋지. 그럼 진선이는 안 좋아?"
"전 진작에,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데요."
환히 웃는 얼굴, 그리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그녀의 심사가 비로소 헤아려졌다. 처음 만난 저녁부터 황당하게도 가슴을 쥐어뜯겼고, 도깨비처럼 나타난 남학생을 따라 무작정 골목길을 걸었고, 이슬을 맞으며 쪼그려 앉아 밤을 지새웠고, 그리고 어느 날 밤 고이 간직해 오던 순정을 바쳤다.
그래. 마음의 짐이 컸겠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도 시원찮을 고3 학생이 여학생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며 주변에서 걱정을 할 때, 어찌 그 속이 편했겠는가. 오늘 낙방이라도 했더라면 그 우려가 비난으로 바뀌었을 터인즉,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하지만 이젠 안심해. 내가 이겼어. 우리가 승리했다고. 저주받은 인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모두가 적(敵)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이제부터 부모형제와 친구들, 선생님, 이웃과 고향, 이 나라 이 민족, 이 세계를 가슴에 품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김진선, 넌 내 인생에 있어서, 첫 승전보를 전해 준 사람이야. 행운의 여신을 내 쪽으로 끌어당긴 사람이라고.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믿음이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고. 그것이 입시의 중압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진선아, 널 사랑해.
by 강성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