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지은 마음

- 16장 자유의지

by 북다이제스터



16장 자유의지




“자유롭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인간만큼

노예 같은 인간은 없다."

- 괴테




논란은 있지만, 우리나라 법은 음주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에 비교적 관대한 편입니다. 술로 인해 ‘심신 미약’ 상태가 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약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역시 치정 범죄에 정상 참작을 인정해 왔습니다.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극한 상태’에서는 자유의지가 온전히 발휘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인들 또한 정신 이상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범죄자가 자신 의지를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질 경우,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법은 인간이 언제나 ‘정상’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행동한다고 전제합니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행위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로 간주됩니다.


이는 칸트의 도덕 철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스스로 악을 선택했고, 스스로 성격을 만들었으므로 네 행위의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고 기독교 교리를 인용해 말했습니다. 인간의 악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이며, 그러므로 개인은 윤리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중세 초기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이런 생각이 보편적이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의 원죄를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문제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늘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생각이 퍼지면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다양한 금지 행위들이 ‘죄’라는 하나의 큰 범주로 묶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특정 행동만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 욕망과 생각까지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살피며 죄책감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감시하는 ‘개인’이라는 존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중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아벨라르는 선한 의지를 도덕의 핵심에 두었습니다. 그는 행위의 옳고 그름이 결과나 행동 자체가 아니라, 행위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지 않고, 어떤 정신으로 행해졌는지를 보신다. 그러니 행위자의 공로나 칭찬할 점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의도에 있다. 죄는 행위자가 악에 동의한 결과다. 잘못이라고 알면서도 악을 의욕한 결과다. 그러므로 공로나 죄는 자유의지의 산물이다.”


아벨라르에게 도덕은 곧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양심에 따라 옳다고 믿는 바를 따랐다면,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죄가 아닙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모든 잘못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을 자발적으로 추구했을 때만 진정한 죄로 간주됩니다.


로마 시대부터 중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죄에 대한 의도’는 멀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 철학에 뿌리를 둡니다. 그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의도된 선택’(그리스어로 prohairesis)에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생각은 로마법과 중세 법학을 거쳐, 오늘날 형법의 ‘죄지은 마음’(라틴어로 mens rea) 개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법은 단지 범죄 행위만으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행위자의 동기를 입증해야 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는 책임이 없지만, 의도한 악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흉악범에게 진심 어린 후회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후회는 즐거운 일이 아니기에, ‘의도된 선택’을 한 자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어 죗값을 치르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죄자를 처벌하려면 ‘의도’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를 명확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검사장 프리츠 바우어(1903~68)는 나치 지도층뿐 아니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한 의복 관리사나 약사, 의사, 경비원 같은 평범한 시민까지 법정에 세웠습니다. 특히 동부 전선에서 복무한 독일 병사들을 잔혹 행위로 기소했을 때, 독일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런 만행은 오직 나치 친위대 같은 광신 집단이나 할 짓이지, 평범한 병사의 책임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소된 평범한 사람들의 진술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땐 누구도 제 행동을 문제 삼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저는 당시 사회 규범과 법을 준수했을 따름입니다.” “저는 그저 약사나 경비원에 불과했습니다.” “나치 정부의 이념과 권위에 현혹돼, 제 행동이 잘못된 줄 몰랐습니다.”


이에 맞서 바우어는 법정과 대중 앞에서 단호히 반박했습니다. “그저 당시의 법을 따랐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 나치 법 자체가 불법이다. 누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 분별력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바우어의 기소는 법정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많은 피고인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거센 비난과 살인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전쟁 상황에서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에 저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단지 종전(終戰) 후에나 있을 수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 우리 주변만 봐도, 선악을 깊이 고민하기보다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평범한 시민은 흔합니다.


아렌트는 이 지점에서 서구 근대가 추구해 온 인간상, 즉 ‘자유의지를 지닌 이성적인 주체가 자율적으로 선을 선택한다’는 이상이 현실과 맞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주체 개념을 전제로 보편적인 정의를 확립하려는 근대의 논리는, 아우슈비츠 재판과 같은 현실 앞에서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욕망이나 계획, 신념 같은 내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분명한 의지보다, 눈에 띄지 않는 외부의 힘에 더 자주 이끌립니다. 겉으로 확신에 차 보이는 사람조차,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확신 뒤에는 자율적인 판단이 아니라, 훨씬 미묘하고 은밀한 힘이 작동합니다.


결국 우리의 의지는 주체적인 결단이라기보다 관성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느끼는 건 ‘선택의 경험’일 뿐, 그 선택의 근거가 반드시 우리 안에서 비롯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자유란 “내가 원해서 했다”는 감각일 뿐, 실제 원인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라기보다, 자유롭다고 느끼도록 설계된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위험한 건 마치 자유인 것처럼 누리는 비자유입니다.



1808년 5월 3일.jpg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1814)



총을 쏘는 병사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병사 한 명에게 “정말 악한 의도로 방아쇠를 당겼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제도나 명령, 역할이 만들어낸 폭력만이 드러납니다. 그림은 법과 도덕이 요구하는 ‘의도’라는 질문 자체가 과연 의미가 있는지 묻습니다.


총살당하는 민중 역시 자유로운 주체로 보이지 않습니다. 중앙의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순교자처럼 보이지만, 이는 영웅적인 자유의지의 찬양이 아니라, 그 자유가 얼마나 무력한지 드러내는 아이러니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