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북다이제스터



에필로그




“세계는 우리가 보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

단 1밀리미터라도 바뀐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제임스 볼드윈





장자는 삶의 질곡을 헤쳐 나갈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길 권했습니다. 익숙한 관점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때, 일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장자는 우리가 걸으며 길[道]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미 주어진 길이 삶을 왜곡한다면, “길은 걸어 다녀 만들어진다”는 그의 말을 떠올려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길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길을 만들려면, 먼저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유의지를 지닌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판단과 선택은 종종 사회적인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개인은 사회 구조의 산물이므로 개인의 의도는 관습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결과에 가깝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는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 장치’가 존재합니다. 가족이나 학교, 교회, 미디어 같은 장치들은 특정 관념을 퍼뜨려, 우리는 진정 자의식이 있는 주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느끼지만, 이미 일정한 틀 안에서 사고하고 욕망하도록 길들여진 측면이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드러내고, 그 잠에서 깨어날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예컨대 자살은 극히 개인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회적인 힘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자살은 개인이 스스로 결정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종종 억울함이나 분노, 절망 같은 감정은 사회 구조에서 비롯됩니다. 지금과 달리 조선 시대에는 자살을 타살로 간주해 수사하고 처벌하기도 했습니다. 자살을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가 강요한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자살은 권력자 중심 사회에서 무력한 개인이 분노와 절망감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마지막 탈출구로 이해되었습니다.


이처럼 사회는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회적인 힘, 이데올로기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제약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때 ‘~하기 위해서’보다 ‘~ 때문에’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이런 언어 습관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세상은 원래 그런데, 어쩌겠어?’라는 무기력을 낳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이 내린 결론을 바꿀 수 없다는 선입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때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의 조언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모든 교리와 신념은 아무리 확고하고 신성해 보여도, 주기적으로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 신념이 사실과 추론으로 무장하고 논쟁이 벌어지는 열린 공간에서 반대 의견과 맞서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받아야 한다. 어떤 신념도 예외일 수 없다. 신념은 현대 문명의 산물로 수 세대 동안 수많은 기득권에게 지지받아 온 만큼, 그들에게 유리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확한 결론을 선호합니다. 결론에 안주하면 편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에 안주하는 순간 사고는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늘 통용되는 해답에 기대어 사는 건 편안할지 몰라도, 그건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상식이나 자신을 옭아매는 기존 질서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상식이나 관습, 제도, 다수의 합의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특정한 시대와 조건 속에서 형성된 잠정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의견 차이와 반대, 불만은 사회의 균열이 아니라, 열린 사회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대동맥과 같습니다. 때로는 주류 의견에 질문을 던지는 용기가 공동체를 더 건강하게 만듭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늘 더 많은 기술혁신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왜 사회혁신은 그만큼 상상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더 크고, 더 다양한 방식의 혁신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다른 삶을 꿈꿀 능력이 필요합니다. 상상력은 인간이 더 나은 세상을 그려내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상상력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각고의 노력 속에서 오랫동안 잉태되어 서서히 형성됩니다. 상상력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요소들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삶의 의미를 재창조한다는 건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당연해 보이는 것을 잠시 멈추고, ‘다른 방식은 없을까?’라고 묻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1968년 혁명 당시 파리의 거리에는 이런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그러면서도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흑인 차별 철폐나 여성 해방, 복지국가와 같은 아이디어도 처음엔 비이성적이라 비판받았지만, 결국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두려움 속에서도 행동한 이들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도전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그 당연한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무엇이며, 왜 그 사회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추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구체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여러 나라의 바람직한 특징만 모은 사회를 상상해 보는 일입니다. 프랑스의 문화 정책이나 스웨덴의 교육 제도, 노르웨이의 교정 시스템, 러시아의 시민 학습 지원, 일본의 인플레이션 관리, 핀란드의 평등한 노동 환경, 독일의 역사 인식, 네덜란드의 시민 자유, 쿠바의 재생 경제, 코스타리카의 단순한 삶, 인도의 의약품 특허 유연성 같은 요소들을 함께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그 어떤 나라의 제도든 한데 모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됩니다.


물론 어느 나라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각 제도는 고유한 역사와 문화, 경제적인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상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맥락에서 실현된 사례들을 비교하고 조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에서는 무엇이 가능할까?”라는 구체적인 질문에 다가가게 됩니다. 상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재구성의 출발점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습니다.


사회의 가치관은 대체로 다수 의견, 곧 ‘여론’ 속에서 형성됩니다. 하지만 사회 변화의 역사에는 또 다른 장면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전체 인구로 보면 극히 적은 비율에 불과한 소수가, 특정 신념을 쉽게 양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제기할 때, 그 주장이 점차 공론장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경우입니다. 위대한 사상은 언제나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처음엔 무시되고, 다음엔 조롱당하다가, 마침내 대중의 지혜로 받아들여집니다. 처음 무관심하던 다수도 어느 순간 소수의 신념을 자기 신념으로 삼게 됩니다. 이는 확고한 목표 의식을 지닌 소수만 있어도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변화는 앞서가는 소수가 균형을 깨뜨리고, 그 불균형에 무게추가 기울면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사회를 바꾸려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소수가 필요합니다.


이런 불균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회적인 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상호주관적인 실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객관성은 없습니다. 객관성은 중립적인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사회적인 관계, 여론 속에서 형성됩니다. 변하지 않는 객관성은 곧 독단입니다. ‘객관성은 없다’의 말은 객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객관성이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으로 인정되지만, 약자의 주관성은 피해 의식이나 과도한 요구로 치부됩니다. 강자의 주관성은 투쟁 없이 객관성의 지위를 얻지만, 약자의 객관성은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가치입니다.


객관성은 없고 오직 ‘상호주관적인 실재’만 존재한다는 관점은 우리의 삶을 더 넓게 바라보게 하고, 행동의 원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상호주관적인 실재라는 인식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의 세계는 유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을 현실로 바꿀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 머리>(1942)



피카소의 작품 <황소 머리>는 1990년대 경매에서 293억 원에 팔렸지만, 일각에서는 조잡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자전거 손잡이와 안장을 결합해 소의 머리를 떠올린 피카소의 상상력 덕분입니다.


상상력은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던 연결을 드러내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감지하게 합니다. 상상력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가능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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