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장 독단
회의주의(scepticism)는 ‘주의 깊게 살피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스켑토마이(skeptomai)에서 유래했습니다. 철학자 폴 커츠(1925~2012)는 회의주의자를 “어떤 주장에도 진실 여부를 따질 의지가 있으며, 정의의 명확성과 논리의 일관성, 증거의 타당성을 묻는 사람”으로 정의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회의주의는 객관적인 탐구와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필수적인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회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는 난관에 부딪힙니다. ‘진리는 없다’거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주장 자체가 어떤 형태로든 진리를 전제로 하기에,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회의주의자는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철학자 로저 스크루튼(1944~2020)이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말을 믿지 말라는 셈”이라고 비꼰 것도 이 자기모순을 겨냥한 것입니다.
예컨대 고대 철학자 아낙사르코스(BC 380~320)가 ‘세계는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말 역시 환상에 불과해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진리 주장은 권력욕의 표출일 뿐’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 자체도 권력욕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와 개념의 덫에 갇혀 있다’는 선언 역시 언어와 개념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자기 지시’(self-reference)에서 비롯된 모순은 흔합니다. 이해하려는 대상 속에 이해하는 주체인 ‘나’ 자신이 포함되면,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입니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나는 거짓말쟁이다”라는 문장에서 나타납니다. 이 문장이 참이면,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고 선언했으니 거짓이 됩니다.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거짓이라고 선언하는 게 거짓이란 뜻이므로, 문장은 참이 됩니다. 이런 주장은 자기 지시의 문제 때문에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모순에 빠집니다.
러셀이 제시한 이발사의 역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이발사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자기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의 수염을 깎아줄 것이오. 다만 ‘스스로 깎는’ 사람은 깎아주지 않겠소.” 그렇다면 이발사 자신의 수염은 누가 깎아야 할까요? 이발사가 스스로 수염을 깎는다면, 그는 ‘스스로 깎는 사람’이므로 자신에게 면도를 해주지 않는다고 선언한 규칙에 따라 자신 수염을 깎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발사가 스스로 수염을 깎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이 깎아야 할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을 깎는다는 규칙 때문에 결국 자신의 수염을 깎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아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지시가 포함된 문장은 참도, 거짓도 될 수 없습니다. 원인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면, 그 원인은 사건 자체와 분리되지 않고 자신의 피드백이 개입됩니다. 이 같은 피드백은 관찰자가 대상에 영향을 미쳐 정보를 잃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러셀은 이 역설을 해결하고자 10여 년을 노력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1931년 괴델은 ‘자기 지시’의 역설을 풀려는 시도 자체가 가망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어떤 형식 체계도 ‘자기 자신’을 완전하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의 ‘불완전성 정리’입니다. 이 증명은 학문에 대한 기본적인 확신을 흔들었습니다. 인간 인식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으며, 우리는 결코 모든 걸 완벽하게 알거나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가령 ‘이 공식은 증명될 수 없다’는 문장도 ‘자기 지시’의 모순을 담고 있어 참·거짓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괴델에 따르면, 이 문장은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공식은 증명될 수 있다는 뜻이 되어 결국 문장은 참이 됩니다. 하지만 이 명제가 참이라는 사실은 그 논리체계의 바깥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체계 안에서는 증명도 반박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체계는 불완전합니다. 체계 내부에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참인 명제(‘이 공식은 증명될 수 없다’)가 적어도 하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괴델의 증명 이후, 수학자들이 꿈꾸던 “모든 수학 명제는 언젠가 참이나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다”라는 낙관은 무너졌습니다. 어떤 체계도 자기 자신을 완전하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괴델은 인간이 가진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섹시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에 내재한 ‘자기 지시’의 난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회의주의자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단정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독단이 됩니다. 그는 진정한 회의주의는 그런 식의 부정적인 교리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회의주의자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판단을 유보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포케(epoche)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논거가 서로 맞설 때,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고 판단을 멈추는 태도입니다. 섹스투스는 회의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회의주의란 감각이나 사유를 통해 제시된 것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양쪽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판단을 유보하고, 그 결과 평온에 이른다.”
이때 도달하는 상태가 아타락시아(ataraxia), 곧 마음의 평온입니다. 회의주의의 목적은 진리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독단을 완화하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과 갈등을 치유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회의주의는 파괴적인 이론이라기보다 하나의 치유적인 실천에 가깝습니다. 확고한 신념에 사로잡힌 자만과 경솔함을 누그러뜨리고, 독단이 낳는 충돌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즉, 회의주의는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외침이 아니라, “성급히 단정하지 말라”는 절제의 기술입니다.
이사야 벌린은 진리를 하나의 영원하고 단일한 체계로 보는 관점에 깊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어떤 결론이 아무리 정교하게 글로 쓰이고, 냉철한 이성에 의해 정당화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궁극적 토대를 갖는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이성적인 다른 사람이 등장해 논박한다면, 그 결론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린에게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역사적·맥락적 조건 속에 놓여 있으며, 절대적으로 고정된 기반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한편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인간의 지적인 활동을 “경험으로 얻은 지각의 질서를 개념의 질서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개념은 지각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범주화하고 일반화하여 개념으로 정리해 현실을 단순화하기 때문입니다. 풍부하고 복합적인 지각은 추상화의 과정에서 일부만 남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계가 드러납니다. 개념은 세계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세계의 다층성과 예외성을 지워버립니다.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한 시대에 자명해 보였던 진리가 다음 시대에는 수정되거나 폐기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확실성은 신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가장 확실해 보이는 명제일수록, 그것이 어떤 전제와 관점 위에 세워졌는지 되묻는 일이 필요합니다. 교조적인 확신은 사유를 멈추게 하지만, 성찰은 확신을 잠정적인 것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회의주의자 흄 역시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인간 인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어, 실재를 온전히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궁극적인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는 무뢰한이거나 바보다. 바보라 함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기에 궁극적인 실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뢰한이라 함은, 이 한계를 알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철학을 따르라고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건 없다는 인식은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고, 다양한 관점에 열려 있도록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이 항상 믿음 ‘뒤에’ 온다고 했습니다. 의심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연을 얼마나 잘 인정하는지, 회의적인 질문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왔는지, 그런 질문을 얼마나 많이 의심해 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의심은 학습과 훈련으로 향상되는 기술입니다. 반대로 그냥 믿는 건 본능에 가깝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접하면 먼저 참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별도의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거짓으로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의심은 후천적으로 길러야 하는 능력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팔정도(八正道,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덟 가지 수행 방법)에서 첫 번째 항목은 ‘정견(正見)’입니다. 흔히 이것을 ‘올바른 견해를 세우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견해를 의심하고 내려놓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사유’(正思惟) 역시 ‘옳은 생각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생각을 멈추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회의주의와도 닿아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생각을 잠시 멈추는 일, 그 확신이 어떤 조건 위에 세워졌는지 돌아보는 일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상식과 양식(bon sens, 진실과 허위를 판별하는 능력)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물론 상식은 사회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공통 기반입니다. 하지만 상식과 양식이 절대화되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기준이 될 때, 그것은 집단적인 분별이 되어 다른 관점이나 삶의 방식을 쉽게 억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억압은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