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충분히 배우고
눈과 귀를 충분히 열면,
우리 영혼은 언제나
더 유연하고 우아해진다.”
- 니체
우리는 흔히 주어진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 너머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사고와 관습에 갇혀, 주어진 규칙과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과연 필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질문을 멈췄기 때문일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유일한 가능성일까요? 다른 길은 정말 없을까요?
이런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문학 작품이 있을까 싶어 인공지능 챗지피티(ChatGPT)에 물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며,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사회를 비판한 소설이 있을까?” 그렇게 해서 추천받은 작품이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의 『화씨 451』(1953) 입니다.
『화씨 451』은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장편 영화와 연극, 오페라 등 다양한 매체로 각색되었으며, 1984년 미국 공상과학(SF) 문학상인 프로메테우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습니다. 소설 제목인 ‘화씨 451도’(섭씨 약 233도)는 종이가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로, 책을 불태우는 사회, 곧 사상 검열과 억압을 상징합니다.
작가는 소설의 출발점으로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1881~1958)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들이 가지런히 줄 처진 종이를 주거든, 줄에 맞추지 말고 다르게 써라.” 이 구절이 『화씨 451』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길을 무조건 따르지 말고, 세상을 다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소설은 책 읽기가 금지된 25세기 미래를 배경으로, 주인공 가이 몬태그가 자신 직업과 사회에 점차 의문을 품게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몬태그는 방화서(放火署)에서 책을 불태우는 방화수(fireman)로 일합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우연히 신비로운 소녀 클라리세 매클런을 처음 만납니다. 사람들은 보통 방화수를 두려워하지만, 소녀는 친근하게 다가와 묻습니다. “지금껏 태운 책 중 읽어보신 건 없나요?” 몬태그는 웃으며 답합니다. “그건 법을 어기는 거지!” 그리고 자랑스럽게 방화수의 슬로건을 알려줍니다. “월요일엔 밀레이를, 수요일엔 휘트먼을, 금요일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마저도 다시 태우자.”
소녀는 대화 방향을 바꿔 몬태그가 모를 법한 질문을 이어갑니다. “예전엔 방화수를 소방수(fire-fighter)라고 불렀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그리고 그때는 불을 지르지 않고 껐다고 하던데요?” 몬태그는 단호히 반박합니다. “아니요, 그건 사실이 아니죠. 예전부터 집들은 항상 화재 예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불이 날 일이 없었어요. 내 말이 맞아요.”
소녀는 또 묻습니다. “예전에는 가족들이 밤늦도록 전등을 켜놓고 함께 대화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던데, 알고 계세요?” 하지만 몬테그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소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과연 과거는 어땠고, 지금과 어떻게 달랐는지, 그는 점점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몬태그가 궁금해 하는 ‘역사’란 무엇일까요? 역사는 단순히 과거 사건의 나열이 아닙니다. 과거 사건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역사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할 때 우리는 나머지 이야기를 침묵시킵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1892~1982)가 말했듯, 역사는 사실일 수 있지만 반드시 ‘진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역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에 따라 살아가고, 그 의미를 후대에 전할 때 우리는 현재와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보려면, 먼저 과거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에 의미를 부여할 때 암묵적인 가정에 의존하는데, 그 가정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나옵니다. 그러한 기억은 우리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기억은 주로 현재 믿음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상을 다르게 이해하려면, 익숙한 기억에 ‘낯선 과거’를 더해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의 낯섦이 부각될 때, 우리는 현재를 상대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미래 또한 지금과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화씨 451』에서 몬태그의 아내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은 ‘골무 모양의 조그만 라디오’를 귀에 꽂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며, 서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거실 사방 벽에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늘 드라마를 보며 현실에 눈감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남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시간을 내어 서로 소통하지도 않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으며, 그들 앞에 놓인 인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드라마를 현실로 여기진 않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비판 없이 수용합니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사회화된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 역시 여러 가지 미묘한 방식으로 자신 경험의 범위를 제한하며 살아갑니다. 단 하나의 신문만 읽거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만 보는 사람은 앎의 영역을 심각하게 좁히게 됩니다. 의견이 같은 이들하고만 대화하는 사람은 스스로 담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관점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지 않는 건 작고 편안한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너머의 세상을 외면하려는 태도입니다.
어느 날 소녀는 다시 몬태그를 만나 세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세상이 참 이상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아요. 그냥 모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사회라고 할 수 있나요? 우리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아요. 대개 침묵한 채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해요. 이미 정해진 답만 따라요. 정말 말도 안 돼요.”
소녀가 말한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정해진 해답”은 바로 ‘이데올로기’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그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 삶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하고, 우리 자신을 규정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이데올로기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세상도 함께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완화하거나 바꾸지 않으면 우리도 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해진 길을 의심하고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때,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바뀌고 우리 자신도 변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어느 날 누군가 책을 숨기고 있다는 신고가 방화서에 접수됩니다. 몬태그는 동료들과 함께 천 년은 더 되었을 오래된 집으로 출동합니다.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집 안에는 노파가 있었습니다. 몬태그는 다락방에서 많은 금서(禁書)를 찾았습니다. 책들이 그의 어깨 위로, 팔 위로, 얼굴 위로 쏟아지는 가운데, 한 권을 얼결에 옷 속에 숨겼습니다. 그 사이 노파는 스스로 불길 속에 남아 책들과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몬태그는 아내에게 그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책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노파가 불타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남아 있게 만드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어. 그저 괜히 불타는 집에 남아 있었을 리 없잖아.” 하지만 아내는 심드렁하게 답합니다. “노파 정신이 이상한 거예요.” 몬태그는 그 사건을 평생 잊을 수 없을 지경인데, 아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반응합니다. 그는 아내의 무관심에 답답함을 느낍니다.
사실상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해지면 편견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은 그 사람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안의 고정관념을 돌아보고 바꿀 계기가 됩니다. 누군가의 처지를 단순히 그 사람 탓으로 여기지 않고, ‘사회적인 힘’, 곧 사회 구조와 연관 지어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생각의 폭이 넓어져 타인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게 됩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힘을 이해하는 능력은 개인이 갈고닦아야 할 일이자,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키워가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다음날, 몬태그가 방화서에 출근하자 비상 출동 경보가 울렸습니다. 몬태그와 서장, 방화수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현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몬태그의 집이었습니다. 동네 사람이 그를 책 보유 혐의로 신고한 것입니다. 몬태그는 서장과 감정적으로 심하게 충돌해, 서장을 방화기로 살해하고 현장에서 도망칩니다.
***
이후 소설은 계속되지만, 우리는 이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가상사회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도 침묵한 채 서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무엇이 좋은지, 공정한지, 정당한지, 올바른지 서로 묻지 않습니다. 사회에 무엇이 진정 필요한지 모르기에, 방향 감각을 잃고 주어진 길만이 최선이라 믿거나, 어쩔 수 없는 차선으로 여깁니다.
사회에 드러난 현상은 아무리 복잡하고 어쩔 수 없어 보여도, 그 근원을 캐보면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집니다. 인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사회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느끼고 상상하는 방식을 바꾸면 익숙한 일도 낯설게 보이고, 놓쳤던 소중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소설 『화씨 451』에 그려진 미래와 달라야 하며, 실제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은 그 어려움을 어떤 맥락에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이 있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 아는 건 물고기다’라는 중국 속담처럼, 일상의 관점에 빠져 살다 보면 우리 스스로 그 관점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관점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때 중요했던 일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거나, 반대로 그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일이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만들려면 우리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야 합니다. 자연스럽거나 필수불가결하거나 옳다고 받아들이는 일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당연하게 보이는 일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회적인 힘’, ‘이데올로기의 산물’입니다. 이 세 가지 관점은 우리 삶의 단순한 표면을 넘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더 깊게 이해하는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바로 그 세 가지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작용하는, 그 미묘하고 복잡한 근원적인 방식을 이해하는데 세 가지 관점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은 넓게 보면 ‘인간’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 그대로의 인간이 됩니다. 사회학자 윌리엄 아이작 토머스(1863~1947)가 제시한 ‘토머스 정리’(Thomas theorem)처럼,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하면, 그 상황은 결국 현실”이 됩니다. 우리 믿음 자체가 ‘자기충족적인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참이라 믿으면,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결국 그것을 현실로 만듭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곧 우리 자신을 만들고, 우리의 세상을 바꿉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기대하는 범위 내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의문이 들면, 그 답은 소수 몇 명의 개별적인 주장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 학문 분야에서만 알아낼 수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각기 다른 개념과 방법론으로 제한된 가정에 따라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학문이 제시하는 관점과 한계를 두루 살피면, 우리는 인간을 조금이나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다루는 분야가 넓습니다. 역사학이나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물리학, 정치학, 인류학, 심리학, 법학, 정신분석학, 종교학, 통계학, 문학, 생물학, 수학, 언어학, 방송학, 신경생리학, 철학, 예술 같은 여러 분야를 포함하지만, 저는 이 모든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기에 제너럴리스트로서 필요한 내용을 소개하려 했습니다. 아울러 저는 종종 사상가들이 한 말을 인용하거나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품격 있고 명료한 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학문적인 책이 아닙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읽다 보면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입니다. 때로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 신념을 되돌아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바라는 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현재를 낯설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의문은 우리 후손이 지금의 우리를 야만이라고 여기지 않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누구나 아는 내용을 담은 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책이라는 창(窓)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뻔하거나 따분해지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또한 내용이 너무 간략해 깊이가 얕지 않으면서, 너무 깊이 들어가 흥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에게 ‘인간’뿐 아니라 ‘무언가’를 새롭게 느끼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크리스 오필리 <성모 마리아>(1996)
오필리는 서양 미술의 관습에 도전하고자 성모 마리아를 흑인으로 표현했습니다. 철학자 마르쿠제는 예술이란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거부해야 한다며, “예술은 현실에 대한 ‘위대한 거절’(great refusal)”이라 했습니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오필리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우리는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기에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예술이 찌르고 치근대고 좋은 의미로 도발할 때까지 내내 겨울잠을 잔다. 낯선 예술 덕분에 내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내가,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