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여성과 편견
1부 역사적인 사건
“역사는 한 때 상식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괴이하게 느껴지는 의식 상태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점은,
우리가 사는 짧은 순간에 얻은 관찰 결과를
영원한 것으로 격상시키는 일이다.”
- 마르크 블로크
1장 여성과 편견
“인간이란 습관들이기 나름인가 보다!”
- 셰익스피어, 『베로나의 두 신사』 중에서
아주 옛날 이브를 만드는 데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내주어 여성은 남성보다 갈비뼈가 하나 더 많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1543년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64)가 남녀 갈비뼈 수를 직접 세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기 전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1845~1918)는 이를 ‘무지 보존의 법칙’이라 불렀습니다. 잘못된 결론이 널리 퍼지면 사람들 생각에서 이를 제거해 내기 무척 어렵고, 이해가 부족할수록 더 깊이 뿌리내린다는 걸 의미합니다. 오류와 편견은 오래 지속되고 만연할수록, 우리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오히려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로마의 과학자 플리니우스(24?~79)는 세계 최초 백과사전인 『박물지』(77?)에서 여성 월경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월경하는 여자에게 우유를 가까이 두면 상한다. 그녀가 만진 씨앗은 생명력을 잃고, 접붙인 나무는 시들고, 정원 식물은 말라간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의 나무는 열매가 다 떨어져 버린다. 그녀 얼굴은 거울의 반짝임을 없애고, 철 끝을 무디게 하며, 상아의 매끈한 표면도 거칠게 한다. 벌떼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죽는다. 그녀의 배설물을 먹은 개는 미쳐 발작을 일으키고, 그런 개에게 물리면 독성 때문에 치료조차 못 한다.”
분명 그러한지 간단한 실험으로 확인해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학혁명 이전 1,500년 동안 누구도 그 믿음을 의심하거나 반박할 증거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단 신념이 생기면,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어도 좀처럼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 신념에 반하는 증거가 나오면 먼저 반박할 논리부터 찾습니다. 그마저도 안 되면 아예 증거를 무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존 신념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철학자 스피노자(1632~77)가 지적했듯, “사람은 현존재를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념을 바꾸기보다 유지하려 합니다. 특히 종교나 국가와 공유하는 신념처럼 공동체를 이루는 믿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스위스는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지녔지만, 여성은 1971년까지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뉴질랜드는 1893년, 핀란드는 1906년, 독일은 1919년, 영국은 1928년에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습니다. 그 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르헨티나와 일본, 멕시코, 인도가 뒤따랐습니다. 1971년까지 스위스는 방글라데시와 바레인, 요르단, 쿠웨이트, 사모아, 이라크와 함께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였습니다. 세계 여성들은 자국 남성보다 평균 47년을 더 기다려 투표권을 얻었습니다. 스위스에서 남성이 처음 투표한 1291년부터 여성까지 포함된 보통선거가 실시되기까지 680년이 걸렸습니다.
스위스 남성들은 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전 세계 남성들이 말한 것과 유사한 주장, 즉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면 여성다움을 잃을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똑똑한 여자처럼 불쾌한 일은 없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여성이 공적인 영역에 나서면 가정이 무너질 거란 우려도 있었습니다. 다른 이유도 많았습니다. 스위스는 여성 참정권 없이도 100년 넘게 평화와 번영을 누렸기에, ‘망가지지 않았다면 고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정치는 남성의 일이라는 통념도 강해, 국사를 여성에게 맡길 수 없다는 목소리도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들이 ‘타당해’ 보였습니다.
부유하고 교육열이 높으며 민주적인 스위스조차 오랫동안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조차 시대나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믿음은 실제로 과거 어느 때 이식된 것입니다. 남들이 알려준 내용이 내가 ‘지각하는 현실’을 만듭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은 결국 다른 누군가가 옳다고 믿는 신념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신념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사유 체계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신념은 세계관이 되어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 됩니다. 철학자 몽테뉴(1533~92)는 “사람들의 신념은 자국의 관습이나 부모의 양육, 우연한 믿음에 휩쓸려 형성된다”며, “태풍에 휩쓸리듯 판단이나 선택의 여지없이, 대부분 사고력이 형성되기 전인 어린 시절에 이미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 삶을 지배하는 신념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습득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 성격을 규정하는 성향과 취향 역시 무의식 상태에서 습득됩니다. 모국어의 문법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과거에 형성된 성향과 습관, 선호는 무의식에 남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생각과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결국 우리는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따라 투표하고, 쇼핑하고, 일하고, 경쟁하고, 협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거나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중, 훗날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만한 일은 없을까요? 오늘날 신성하고 자명하며 보편적이라 받아들여진 것이 나중에 논란이 되는 일은 없을까요? 우리 시대의 중요한 가치가 후손에게는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일은 없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허용하는 일이 훗날 나치 독일이나 제국주의 일본 수용소처럼 충격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 옳다고 믿는 신념이 미래에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객관적인 진실은 없습니다. 오직 ‘상호주관적인 실재’(inter-subjective reality)만이 존재합니다. 상호주관적인 실재란 참이거나[眞] 옳거나[善] 아름답다고[美] ‘당시 대다수가 믿는 사실’을 뜻합니다. 세상이 있고 우리 마음이 이를 인식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모여 세상을 그려냅니다. 우리 바깥에 독립된 외부 세계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며, 우리가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마음이나 생각은 늘 변합니다. 상식은 시대의 산물이며, 한 순간만 유효합니다. 예전엔 당연했던 많은 일이 지금은 더 이상 공유되지 않기도 합니다. 예컨대, 철학자 플라톤(BC 428?~327?)은 『국가』(BC 360?)에서 예술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항아리를 아름답다고 보았습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는 이를 확장해, 미(美)란 적당한 비례와 밝기, 명료성은 물론 완전무결함에서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의 반대인 추(醜)는 비례에 어긋나는 것, 즉 아퀴나스가 “축소되어 욕되다”고 규정한 큰 머리와 짧은 다리를 가진 사람이나, 다리가 하나 없거나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비례와 조화를 이루는 미란 무엇일까요? 아름다움의 의미는 시대마다 달라져왔습니다. 수세기 걸쳐 비례에 맞는 미가 이상적으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기준은 변했습니다. 1900년 무렵 많은 사람이 예술을 오직 아름다움으로 정의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마네(1832~83)와 모네(1840~1920) 같은 인상주의 화가 덕분에 ‘예쁜 장면이 없이도 그림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각가 로댕(1840~1917) 덕분에 ‘아름다움이 없어도 조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1819~1900)은 예술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단지 미학적인 기준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색의 조화나 대칭, 비례보다 작품이 구현하는 가치나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이러한 믿음은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1540)
1520년경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양식이 유행했습니다. 많은 화가가 미켈란젤로의 화풍, 곧 비례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모방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예술가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파르미자니노가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목을 현대 화가 모딜리아니처럼 길게 그려, 의도적으로 비례를 깨뜨렸습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하고 새로운 표현을 추구한 파르미자니노는, 최초의 ‘현대’ 작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할 때는, 다른 사람과 나눈 경험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통해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나 가치, 규범을 익힙니다. 남들이 알려준 내용이 나의 ‘객관적인’ 현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처럼 다수 의견에 순응하는 성향 때문에, 우리는 공유된 경험이나 환상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 흐름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가령 코르셋이 유행하던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르네상스부터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코르셋은, 여성이 스스로 아름다워 보이길 원했든, 많은 남성이 그 아름다움을 갈망했든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호주관적인 실재’를 보여줍니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은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자기 나이보다 훨씬 가느다란 허리로 결혼하길 꿈꿨습니다. 당시 이상적인 허리둘레는 14∼15인치였습니다.
당시 가느다란 허리가 가슴을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곡선미를 과장한 실루엣이 유행해, 개미처럼 가는 허리에 분수처럼 풍성한 치마를 입었습니다. 가슴을 노출하는 것보다 장딴지나 발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걸 더 수치스럽게 여겨, 치마는 점점 길어졌습니다. 반면, 가슴 노출은 어느 정도 허용돼, 상의는 점점 더 깊게 파였습니다.
코르셋에는 보정 효과를 높이고자 길고 뻣뻣한 지지대를 넣었습니다. 실용적으로는 동물 뼈나 강철 같은 튼튼한 재료가 적합했지만, 상류층 여성은 장식용으로 은이나 상아, 고래수염 같은 재료를 쓰기도 했습니다. 지지대에 시구나 명언을 새기는 것도 유행했습니다. 지지대는 성적인 상징으로 여겨져, 코르셋에서 이를 빼주는 행위는 유혹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코르셋으로 허리가 너무 조여 숨쉬기 어려운 여성들을 위해 옷을 잠시 풀고 쉴 수 있는 방이 따로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문학 작품에는 여성들이 신경쇠약이나 히스테리, 졸도 같은 병에 시달리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그 원인의 대부분은 코르셋 탓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호흡곤란으로 기절한 여성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면 오히려 ‘최고 미인’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코르셋은 허리를 지나치게 조여 탈장을 일으키거나 장기를 압박해 내출혈을 일으켰습니다. 저녁에 코르셋을 풀면 피가 배어 나오는 일도 흔했습니다. 장기 위치가 영구적으로 뒤틀리거나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재채기만으로 허리에 무리가 가 숨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코르셋만으로 허리가 충분히 가늘어지지 않으면, 갈비뼈를 제거하는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78)는 가느다란 허리로 남성의 부속물이 되려는 여성의 허영심을 비판하며, “코르셋은 여자를 타락시키는 물건”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혼기에 찬 여성에게 가는 허리는 가문이나 재산만큼 자신을 돋보이게 했기에, 코르셋은 20세기 초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에드가 드가 <에투알>(1878)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스타’, 즉 주연급 발레리나를 뜻합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오페라극장은 상류층 남성을 위한 창관(娼館)이었고, 발레리나는 사실상 그곳의 창녀였습니다. 당시에는 복사뼈 이상 다리를 드러내는 걸 수치로 여겨, 정숙한 여인은 반드시 긴 치마를 입었습니다. 다리를 보이는 건 오늘날로 치면 가슴을 다 드러내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발레는 주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하층계급 딸들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발레리나는 돈 많은 남성을 후원자이자 애인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