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선거
10장 선거
“오늘날 적(敵)은 더 이상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 알랭 바디우
1914년 이전 민주주의를 실현한 국가는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네 나라뿐이었습니다. 이후 1972년에는 44개국, 1993년에는 72개국으로 늘고, 오늘날에는 108개국이 선거로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를 채택한 적도, 이처럼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를 지지한 적도 없었습니다.
선거에 기반한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국민의 정치권력을 선거로 한 사람 혹은 다수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제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근대 국가의 규모와 인구가 커지면서 고대 아테네처럼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지자, 그 대안으로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가 채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선거로 뽑은 선량(選良)을 경멸하면서도, 선거 자체는 숭배합니다. 선거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없으며, 선거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자 정수라 믿습니다. 우리는 선거를 단순히 민주주의에 도움 되는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선거 자체가 민주주의와 분리할 수 없는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신성한 원칙으로 여깁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선거 근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선거 강박은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인류가 민주주의를 시도한 지 3,000년이 되었지만, 선거로 민주주의를 실현한 역사는 200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거만이 믿을 수 있는 방법이라 확신합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반장이나 회장 선거에서도, 투표를 하면 곧 민주주의가 보장된다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대부분 ‘전해들은’ 것입니다. 그렇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현 체제의 질서에 맞게 다듬어져,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줍니다. 체제에 부합하는 논리가 사회에 널리 퍼지면, 우리는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사회화가 잘된 사람일수록 인식 폭은 좁아지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실체(existence)가 자명하고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여겨지면, 그것은 곧 실재(reality)로 굳어집니다.
우리는 선거를 비판하는 순간 ‘반민주적’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통제와 억압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통제하고, ‘합의’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며, ‘절차’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지워버립니다.
이제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실재에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피레네산맥 한쪽에서 진리인 게 다른 쪽에서는 잘못”이라고 말한 파스칼(1623~62)의 지적처럼,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인간의 인식은 사회 속에서 결정됩니다. 사회는 실체를 만들 뿐, 실재의 본질을 결정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국민 의지를 실행하는 ‘공복’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자 헤겔(1770~1831)이 지적했듯, “의회는 관료들의 판단을 국민에게 알리고, 마치 국민이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믿게 만드는 정교한 장치”일 수 있습니다.
철학자 표트르 크로포트킨(1842~1921)은 의회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유럽 절대왕정 시대에 군주는 중요한 사업을 앞두고 토지 귀족인 신하들과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하들 간 이해를 조정하거나, 특별 군사작전을 심의하는 자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이나 공공사업에 필요한 ‘돈’ 문제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습니다.
돈 문제가 군주와 신하들 사이 협의의 핵심이 되자, 군주는 돈 많은 자본가인 도시 대표들을 궁정으로 불러 논의에 참여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도시 대표들은 당시 가장 풍부한 세금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도시 대표들은 귀족과 구분되는 별도의 신분, 곧 훗날 하원으로 발전할 집단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시민을 대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대다수였던 농노와 농민은 참정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군주가 도시 대표들과 중대사를 의논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점차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관심사는 세금이었습니다. 도시 대표들은 군주가 자신들의 불만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새로운 과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가령 ‘의회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원칙을 담은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1215) 제12조는 이후 영국 대의제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의 제도로 유럽 각국에서 군주와 토지 귀족, 자본가는 각자 이해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농민과 도시 하층민의 이해는 배제되기 일쑤였습니다. 도시 대표였던 자본가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발언했습니다. 그 결과 의회는 왕권을 견제하는 동시에 대중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제한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힘을 잃어가는 왕정을 압도하는 대규모 자산가들이 의회에서 강력한 과두체제로 부상한 것입니다. 크로포트킨은 “자본가가 대중을 착취하는 사회는 의회주의에 만족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브라질 국회의사당>(1964)
브라질 국회의사당 건물은 브라질이 추구하는 이상을 상징합니다. 이 건물은 브라질이 미래에 질서와 조화가 지배하는 고상하고 평온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현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국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건물처럼 우아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건축물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바르게 일하라고 일깨웁니다.
의회가 탄생한 이후 대의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사실 19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서양 사회의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를 몹시 혐오했습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가난한 다수가 권력을 잡아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분명 사회주의로 이어질 불길한 서곡이며, 가난한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인 사회 혼란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 두려움이 1848년에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해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시칠리아의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프랑스 2월 혁명(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1862)의 배경)이 발생해 왕정이 무너졌습니다.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 일어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독립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했고,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도 민족 독립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1848)을 발표했습니다. “유럽을 떠도는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이 선언은, 당시 지배계급이 느낀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지배계급에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위협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혁명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노동빈민이 주도한 사회혁명이고, 이로 인해 지배계급은 깊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민중은 지배계급 전반을 공격했지만, 특히 군사를 보유하지 않은 자본가 계급을 집중 겨냥했습니다. 지배계급은 달갑지 않았지만,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배계급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민주주의는 대중이 지배함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개 가난한 자들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특권층과 비특권층은 서로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면, 지배층의 특권과 재산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배층은 일부 선거권을 허용하되 운영 규칙을 자신들이 직접 정하면, 민주주의가 큰 위협이 되지 않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이는 결국 선거권의 제한적인 확대(재산, 성별, 교육 수준에 따른 자격 제한)와 의회제, 정당제, 관료제 등 대중 참여를 형식화하는 장치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대중이 정치 무대에 오르는 걸 허용하되, 그 무대를 설계하고 조명과 대본을 쥔 자는 여전히 지배계급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게 ‘이익이 되는 체제’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대중의 급진적인 요구를 제도 속으로 흡수하고 조율하는 ‘통치 기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