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능력주의, 민족주의

- 10장 선거

by 북다이제스터




1848년 시민혁명 이후 나폴레옹 3세(1808~73)는 국민투표를 제도화하면서도 특정 집단과 기구에 특별 투표권을 부여해 안전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때로는 유언비어로 유권자를 겁주면 선거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습니다. 민의를 쉽게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대중 선동과 홍보, 선전 활동으로 나라를 통치한 근대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중 민주주의는 단순한 '다수결 원칙'을 넘어, 여론을 어떻게 만들고 관리할 것인가라는 정치 기술의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선거나 언론, 여론조사, 선전 활동은 모두 ‘민의를 관리하는 기술’로 제도화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확대되었지만, 실제 권력은 여전히 이를 조율하는 소수의 손에 남았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국민투표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듯 보이는 수완을 발휘하면, 오히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 절대군주의 구(舊)체제) 시기의 군주들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민 징병제입니다. 그는 구체제 군주들이 상상도 못 할 규모의 병력을 징집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 징병제와 민주주의가 같은 시기에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민중에게 정치적인 권리를 준 듯 보이게 하고 민족주의 정신까지 고취하면, ‘자신의 국가를 위해 싸운다’고 믿는 병사는 군주제 국가의 병사보다 훨씬 잘 싸웠습니다. 국민이 전쟁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다고 믿게 될 때, 더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이전의 전쟁은 대개 영토나 상속, 왕위를 둘러싸고 상비군을 거느린 군주들이 벌인 제한된 충돌이었습니다. 전투를 가급적 피하고, 소수 병력으로 요새를 방어하며 희생을 최소화하려 했기에 일반 민중은 전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대규모 징병군을 집중해 단번에 승부를 내는 기동전을 펼쳤습니다. 전쟁은 군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총력전(total war)으로 바뀌고, 그에 따라 피해 규모도 커졌습니다.


프로이센 장군이자 군사이론가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는 이러한 전쟁 양상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을 직접 경험하며 전쟁의 본질을 분석했고, 『전쟁론』(1832)에서 국가를 본질적으로 영구적인 전쟁 기계로 보았습니다. 국가는 타국의 희생으로 이익을 얻으므로 전쟁 방식은 가능한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유혈 참사를 개의치 않고 무력을 아끼지 않는 쪽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보았습니다. 적을 지치게 만드는 지구전이나 대규모 파괴 전략을 지지했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적의 영구적인 무장 해체였습니다. 이길 때는 조건 없는 항복을 강요하고, 질 때는 끝까지 저항하며, 승리 후에는 패배자에게 보복적이고 가혹한 조건을 요구하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었습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미국과 유럽, 일본의 군사와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사상은 선제공격을 정당화하며 전쟁을 더 자주, 더 잔혹하고 더 파괴적으로 만들어 희생자가 많아졌습니다.


총력전에 대비해 징집한 대규모 국민군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군수 물자가 필요했습니다. 이때부터 군대와 상업은 긴밀하게 얽히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이 무기 납품에 참여하면서, 군산(軍産) 복합체의 전신이라 할 ‘군상(軍商) 복합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각국 정부는 군수품을 생산하는 직인 공방과 공장 그리고 광업과 야금업에 종사하는 기업가, 자본가, 은행가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시장, 곧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두 축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전쟁은 산업을 성장시키고, 산업은 다시 전쟁 수행 능력을 강화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입니다.


나폴레옹 3세 집권 시기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기업가와 전문 직업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자본가 계층이 사회에서 인정받도록 ‘능력주의’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은 이미 19세기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기에 제정되었지만, 나폴레옹 3세 시기에도 그 법체계는 개인주의와 재산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계승·활용되었습니다. 법은 사유 재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호하고, 임대차 계약이나 주식회사 설립 같은 제도를 뒷받침했습니다. 상업 활성화를 위해 도량형을 통일하고 노동조합을 금지했으며, 전반적으로 기업가와 사업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했습니다.


이처럼 지배층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민주주의를 옹호한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효과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정치학자 베르나르 마냉(1951~ )의 지적처럼, “현대 민주국가들은 민주주의에 반대하려는 인사들이 제안하고 정립한 통치 형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는 민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막으려는 자본가들이 고안한 제도입니다.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이 그림은 상인 계급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상화는 본래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기록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장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전까지 그려지지 않았던 상인이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술사에서 의미가 큽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근대적인 개인과 사생활의 탄생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와 언론인, 자본가, 금융가는 모두 민족주의를 내세워 지배계급과 피착취계급이 하나의 공동운명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쪽은 호화롭게 살고 다른 쪽은 땀 흘려 일하거나 굶주리더라도, 모두가 ‘한 배를 탄 국민’이라는 서사가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를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순간, 가난한 자와 노약자,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억압은 쉽게 가려집니다. 민족주의는 결국 민족 내부의 수탈과 억압을 가리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합니다.


민족주의는 자연스러운 실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우연히 같은 땅에 태어나고 같은 언어를 쓴다 해서 자동으로 정신적인 유대가 형성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민족을 결정짓는 고유한 유전자나 생물학적인 특성이 있다는 주장에도 과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연구는 한 민족 내부의 유전적인 차이가 민족 간 차이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전적인 특징은 집단 사이에 널리 겹치며, 특정 집단에만 고유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민족은 명확한 경계를 지닌 실체라기보다 모호한 범주에 가깝습니다.


사회인류학자 어네스트 겔너(1925~95)는 민족이나 민족주의, 민족국가 모두가 18세기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근대 문명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민족주의와 관련된 감정과 정서 역시 ‘인간 본성’에 뿌리박힌 것이 아니라,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인 산물입니다. 겔너에 따르면, 전통 사회에서는 민족주의는 물론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서구에서는 18세기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초 신문과 소설 같은 근대 매체가 확산되면서 민족이라는 관념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철저히 원자화되어 서로 경쟁합니다. 그 결과 빈부 격차는 커지고 사회 구성원의 유대는 약화되며, 개인은 모래알처럼 흩어집니다. 이때 국가는 민족주의를 내세워 흩어진 개인을 ‘민족’이란 이름 아래 다시 묶어냅니다. 민족주의는 분열된 사회 갈등을 봉합하고 대립을 완화하는 국가의 정치적인 도구입니다. 자본주의가 개인을 흩어놓으면, 국가는 개인을 ‘민족’이란 상징을 통해 하나의 집합으로 ‘총체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민족주의가 나치즘이나 파시즘을 떠올리게 하며 부정적인 의미를 띄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민족주의 대신 애국주의 또는 애국심이라는 표현이 더 선호되기 시작했습니다.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덜어내고 긍정적인 면만 남긴 개념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는 두 개념의 차이가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민족주의는 거슬리는 애국심이고, 애국심은 선호되는 민족주의다”일뿐입니다.


현대 국가들이 애국주의 담론을 활용하는 방식은 여러 사례에서 관찰됩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최근 애국주의에 더욱 강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커져가는 빈부 격차와 고위 간부층의 부정부패에 분노한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공산당이 최근 몇 년 사이 근현대사를 다시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중국 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 중심 서사였다면, 오늘날에는 아편전쟁에서 시작된 굴욕의 역사와 1895년의 청일전쟁, 1937년~1945년 중일전쟁 등 외세 침략에 맞선 민족 저항이 더욱 강조됩니다. 과거 서사가 ‘중국인이 중국인과 싸운 이야기’였다면, 지금의 서사는 공산당이든 국민당이든 중국인이 외세와 맞서 싸운 ‘민족 투쟁의 역사’로 재구성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새로운 서사는 대중 분노를 외부로 돌리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관련된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 진실이든 조작이든, 과거든 현재든 – 중국 사회는 즉각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시위가 벌어지고, 중국 내 일본인 재산은 파손되며, 애국주의 열정이 타오릅니다. 중국 정부가 문화대혁명과 텐안먼 사태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대중 분노의 허용된 배출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배출구가 바로 반일 감정입니다. 중국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의도적으로 부추겨, 내부 불만이 공산당을 향하지 못하도록 교묘히 비틀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중국은 고분고분하고 단결된 자국민을 만들기 위해, 국가 신화를 창조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은 경제학자 베블런의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를 “영리 기업이 자국민을 희생양 삼아 해외에서 공격적으로 돈을 버는 데 활용하는, 타국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의했습니다. 기업은 자국민의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해 해외에서의 공격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국내에서의 경제적인 착취를 가립니다.


“애국주의 덕분에 시민들은 자국 사업가가 해외에서 얻은 이득이 공동체 전체에도 이롭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업가의 이득은 철저히 사적이며, 시민의 희생에서 얻은 것임에도, 충직한 시민들은 ‘국민 일체’라는 환상 때문에 자신도 그 이익을 함께 나눌 것이라 착각한다.”


국가가 민족주의나 애국심을 고취하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기업입니다. 특정 기업이 국내에서 직원이나 하청업체, 소비자를 착취하더라도, 해외에서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빠진 국민들은 그 기업을 ‘일류기업’이라 치켜세웁니다. 국민 개개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잘 나가는’ 기업을 비판하면, 곧바로 시기나 질투 때문이라는 낙인 따라붙습니다.


이처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가 결합된 구조 속에서 활용되는 사회적인 자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국가와 기업, 대중 사이의 관계를 조직하는 중요한 상징 체계라는 점에서,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능력주의, 민족주의는 서로 독립된 가치가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삼위일체로 작동합니다. 민주주의는 정치 무대와 선거 과정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소수 엘리트가 대중에게 권리를 준 듯 보이게 하는 도구입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른 성취를 강조하며, 사회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결과처럼 포장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듯 보이게 해서, 내부 착취와 차별을 은폐하고 기업 이익을 정당화합니다. 이 세 이데올로기는 서로 보완하며, 자본의 이익과 질서를 보호하고 강화하는 정교한 ‘사회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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