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의견이 다를 뿐

- 12장 관용[똘레랑스]

by 북다이제스터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이상(理想)을 내세웠습니다. 이때 박애는 사실상 관용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 후 풀리지 않은 문제가 남았습니다. 자유와 평등이 상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유가 지나치면 평등이 무너지고, 평등이 지나치면 자유가 침해될 수 있습니다.


박애 또한 평등과 이율배반적입니다. 지나친 관용은 오히려 평등을 해칠 수 있습니다. 관용이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듯 보여도, 결국 ‘하나’의 기준으로 나머지를 배제하려는 것입니다. 다양성 옹호는 평등과 모순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오늘날 미국인은 1950년대나 심지어 1980년대보다 더 관용적이지만,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었습니다. 관용이 강조될수록 평등은 약화됩니다. 관용은 개인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관용을 옹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놀라울 만큼 독립적이며, 개인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존중합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 적어도 겉으로는 – 관용을 보이며,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누구나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논란이 될 만한 도덕적인 담론이나 논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성급하게 토론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남의 말을 들을 뿐입니다. 설득은 쓸모없음을 알기에, 단순히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우리는 그저, 다를 뿐이야’ ‘개인의 선택이다.’ ‘다양성을 존중하자’고 말합니다. 논쟁에서 이기려 하거나 상대가 틀렸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 하지 않으며, 모든 걸 내버려 둡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대주의가 결국 무관심으로 이어집니다.


관용을 옹호하는 개인주의는 ‘사회에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입니다. 삶의 의미는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주의는 공동체 유대를 약화시키고, 도덕적인 지평을 흐리게 합니다.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이나 ‘허전함’ 역시, 공동체 유대가 상실되면서 생겨난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플라톤은 “민주정체에서 지나친 자유는 지나친 예속[전제주의]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75)도 공동체 유대가 사라진 고독한 군중이 파시즘에 쉽게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공동체 유대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굶주려 지도자의 달콤한 말에 쉽게 현혹됩니다.


개인주의 사회는 고립과 고독을 낳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정상적인 삶이 쇠퇴하고, 파시즘이 힘을 얻습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독재자에게 자신 자유를 넘겨주거나, 꼭두각시 인형 같은 존재가 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삶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친숙한 것’, 곧 자신이 속한 나라나 민족, 때로는 인종 속으로 퇴각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공동체 유대가 무너져 삶이 불안해지면, 민족주의나 인종주의, 심지어 파시즘까지도 삶의 버팀목이자 감정의 피난처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관용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의 정치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정부가 각 시민이 지지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합니다. 사람마다 ‘좋은 삶’의 기준이 다르기에, 정부가 이를 법으로 단정해선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대신 정부는 개인을 자유롭고 독립된 존재로 존중하며, 각자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관용과 개인 권리를 강조하는 전통 사상, 즉 존 로크와 임마뉴엘 칸트에서 시작해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 전통을 포함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토론이나 논쟁은 이 전통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대표적으로 칸트는 타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배려하는 자유로운 양심, 곧 관용에서 사회 문제의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의 선한 양심은 ‘자유로운 자아’를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개인은 사회와 문화에 얽혀 있어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가치관을 지닐 수 없습니다. 철학자 에마뉴엘 레비나스(1906~95)는 자유를 양심의 원천으로 본 칸트의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칸트가 말한 절대적인 자유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항상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거나 제한합니다.


레비나스는 양심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옳게 주장했지만, 아쉽게도 공동체 유대의 원천을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에서 찾았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을 때, 그들의 짐을 함께 나누는 일이 공동체 유대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감에 기초한 연대는 감정의 기복에 따라 쉽게 흔들리며,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공동체 결속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1929~ )도 레비나스와 비슷한 견해를 가졌습니다. 사회 구성원이 이성적으로 노력하면 사회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여 이기심을 내려놓고 공동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면, 사회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핵심은, 이성적인 합의로 서로의 행동을 조정하고, 공통된 이해에 도달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버마스는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전제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감정이나 이해관계, 권력, 선입견에 쉽게 지배됩니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했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 즉 빈부 격차나 사회 대립은 상호 동정심(sympathy)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 경제를 추구하는 미국에서는 동정심이 많은 자원봉사자나 기부 문화가 넘쳐나도,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결함은 이러한 ‘도덕 감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동정심은 사실상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레비나스나 하버마스, 스미스가 말한 공감과 배려, 이해, 동정은 모두 사회와 문화에 길들여진 개인의 감정이며, 본질적으로 관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에서, 개인의 도덕성이 집단에 그대로 투영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집단에 만연한 ‘이기성’ 때문입니다. 여기서 ‘집단’은 사회나 국가, 민족, 계층 등 모든 형태를 포함합니다. 니버는 개인의 도덕성으로 부도덕한 집단이 개선될 거란 기대는 순진한 생각이라 단언했습니다. 톨스토이식 개인 도덕성 함양으로는 사회를 개혁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의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단은 개인이 혼자 있을 때와 다르게 느끼고 행동합니다. 개인의 정신 상태는 집단의 정신 상태에 의해 좌우되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의식과 개성은 사라지고, 집단과 동일한 감정과 생각만 공유됩니다. 그 결과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지적 능력이나 전문성, 경험 등의 총합이나 평균은 집단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단 속에 남는 건 개인들의 무의식뿐입니다. 집단은 이 무의식만 공유하기에, 높은 지능을 요구하는 이성적인 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집단 내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 있어도, 모두가 평범한 자질만 공유합니다. 이러한 평범함 때문에 집단은 계획하지 못하고, 순간의 자극에만 반응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불교의 자비는 관용이나 공감, 동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자비(compassion)는 종종 공감(empathy)이나 동정(sympathy)과 함께 논의됩니다. 공감은 ‘타인 감정에 이입하는 것’이고, 동정은 타인과 ‘함께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 다 타인의 표층 의식, 즉 현재 느끼는 의식에 접근합니다.


반면 불교의 자비는 심층 의식, 즉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잠재되어 있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보다 깊고 보편적인 마음에 닿습니다. 겉으로는 각기 다른 마음을 지녔더라도, 그 깊은 곳에는 다르지 않은 하나의 마음이 공명한다고 봅니다. 불교는 이 심층 마음을 불성(佛性)이나, 진여(眞如, 평등하고 차별 없는 그대로의 모습)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카를 융(1875~1961)은 불교의 이러한 심층 마음, 즉 자비를 집단 무의식으로 설명했습니다.


관용이나 연민, 동정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비대칭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진정한 관용이나 연민, 동정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환대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갈 곳 없는 이주자나 쫓기는 이방인에게 손을 내미는 환대는, 그를 손님으로 맞는 주인 행세에 불과합니다. 예컨대, 부자가 자신을 동정하는 가난한 자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자가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이처럼 동정이나 환대는 자비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인식에서 평등한 자비심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 평등한 자비심은 ‘의도적인’ 연민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잠재력이 있다는 ‘무의식적인 평등 인식’에서 나옵니다. 모든 중생은 ‘부처’로서 평등합니다. 부처에게는 높고 낮음,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자비란 이러한 평등을 바탕으로, 만나는 모든 중생을 부처로 대하는 일입니다. 친하든 낯설든, 가깝든 멀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를 부처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돕는 일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우리가 마땅히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비는 의식적인 노력으로는 어렵고, 무의식에서만 가능합니다.


자비란 자신을 부처로 여기고, 만나는 모든 이를 잠재적인 부처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만 다른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해서 사회가 바뀌지 않습니다. 지위 차이 없는 ‘평등 인식’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사회 전체의 무의식적인 변화에서 비롯됩니다. 사회의 무의식이 바뀌기 전에 개인에게 관용으로 차이를 극복하라 요구하면, 우리는 계속 불편함을 느끼며 참된 평등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용은 스스로 우월한 위치에 서서 차이를 ‘허용하는’ 의식적인 방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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