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관용[똘레랑스]
사회 문제를 개인에게 맡겨 해결하려 한 유명 인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도의 ‘성자’ 간디(1869~1948)입니다. 그는 자기 통제와 정화, 고통 같은 금욕을 수년간 실천하면 비폭력 저항의 용기를 기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간디의 추종자들은 순결을 지키고 가난하게 살며,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단식과 노동, 기도는 자기완성의 수단이자 사회정의를 수호할 전사를 기르는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간디는 “세상을 바꾸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의 모범으로 예수를 꼽았습니다. 예수는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복음 5:41>)”고 말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은 군인이 민간인에게 1.5킬로미터(천 걸음)를 짐 지고 가도록 강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요구에 더 많은 걸음을 제안하며, 악에 선으로 맞서라고 가르쳤습니다. 비폭력 저항의 핵심은, 박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데 있습니다. 간디에게 예수는 악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맞선 비폭력 저항의 투사였습니다.
간디는 폭력을 쓰면 비폭력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폭력은 폭력적인 성품을 만들고, 그런 사람은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비폭력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윤리적인 실천 지침이었습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저항이 누구에게나 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박해자에게 양심이 없다면, 양심에 기댄 비폭력 저항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는 양심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양심에 호소할 수 없는 상대에게는 비폭력 저항이 통하지 않습니다. 간디의 사상에 감동한 이들이 있더라도, 나치의 게슈타포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1900~45) 같은 자에게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나치 치하의 유대인에게 권장됐다면, 그건 집단 자살을 권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금욕은 도덕적인 행위였을까요? 일반적으로 금욕은 정신 수련을 거친 고수만 실천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일반인에게 금욕을 기대하는 종교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간디는 누구나 엄격한 규율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신념은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에게 고통이 되었습니다. 간디가 고집한 채식주의 식사 탓에 아내와 자녀들은 굶어 죽을 뻔했고, 그의 엄격한 규율은 가족과 갈등을 낳았습니다. 가족 중 누구도 그의 사상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일부 추종자는 간디의 운동을 거부하거나, 규율을 지키지 못한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뒤, 간디는 생애 마지막 30년을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합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공동체 간 잔인한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인도는 끝내 파키스탄과 분리되어 전쟁까지 겪었습니다. 간디는 이 비극적인 결말로 자신의 평생 노력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꼈습니다.
간디는 모든 인간이 우주적인 영혼의 일부로 똑같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모두에게 관용을 베푸는 건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관용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간디는 세상을 변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이상은 약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생각할 것이라 믿었고, 지나친 관용주의를 요구했습니다. 성인(聖人)은 영감을 줄 수는 있어도, 그대로 따를 모델이 되긴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 오랜 기간 관용을 보이라고 가르치고 설득하며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인도 독립 후, 간디는 자신 노력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독립한 인도는 그가 꿈꾼 너그럽고 폭력을 거부하며, 영적인 수련에 매진하는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슬림이 분리되어 새로운 파키스탄을 세운 일도 간디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는 명백히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포용하던 인도의 관용 정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풀기 위해, 자신의 적(敵)이던 무슬림 지도자 진나(1876~1948)를 힌두교 인도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법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간디뿐이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강하게 반발했으며, 간디는 무슬림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듯 보였기에 결국 힌두 광신도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관용을 내세우는 힌두교조차 이런 편협함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인도인들은 로마 교황 같은 절대적인 종교 지위를 인정한 적이 없으며, 진리가 오직 하나뿐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만큼 관용적이었습니다. 인도인들에게 영국인은 그들 앞을 스쳐간 수많은 ‘야만인’ 정복자 중 하나에 불과했고, 오랫동안 축적된 인도 문화의 퇴적층에 한 겹 더해진 존재로 여길 정도로 관용적이었습니다. 인도 사례는, 전통적으로 관용을 중시하는 나라에서조차 간디 같은 뛰어난 인물이 실천해도, 관용은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노레 도미에 <트란스노냉 거리, 1834년 4월 15일>(1834)
이 그림은 1834년 파리 노동자 봉기 이후 총성이 들렸다는 이유만으로 군인들이 한 건물에 난입해 거주자 전원을 학살한 사건을 묘사합니다. 그림은 영웅도, 투사도, 저항의 몸짓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침대 아래 쓰러진 남자, 그 아래 깔린 아이, 곁에서 이미 숨이 끊어진 듯 늘어진 노인 앞에서 간디의 관용 조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국가는 얼굴이 없고, 국가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국가는 회개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