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가 아닌 우위

- 12장 관용[똘레랑스]

by 북다이제스터



우리는 흔히 ‘차이를 인정하라’, ‘다름을 존중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차이를 좁히기 어렵기에 관용이 필요하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관용이라는 감정적인 접근만으로 차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관용 담론은 차이를 고정시키고, 그 차이를 통해 지배와 종속의 구조를 은밀히 재생산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여전히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됩니다. 같은 교육 수준의 백인 남성과 비교해도 흑인 남성의 소득은 평균 30퍼센트 낮습니다. 백인이나 자본이 흑인과의 실질적인 평등을 원할 리 없습니다. 대신 흑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자는 문화적인 관용 운동에만 집중합니다. 흑인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기보다 백인에게 흑인을 ‘관용하라’고 설득하는 데 그칩니다.


이때 다양성을 내세운 관용 담론은 흑인과 백인 사이의 실질적인 위계를 감춥니다. 흑과 백은 단지 다양한 가치가 아닙니다. 관용은 차이를 동등한 가치로 포장함으로써, 오히려 불평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백인에게 흑인을 관용하라고 설득하는 일은, 인종주의를 유지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합니다.


더 나아가 관용 담론은 기업이 가난한 백인까지 착취할 여건을 만듭니다. 백인들이 자본주의 때문에 겪는 문제를 흑인 탓으로 돌리게 하면서, 흑인과 백인 노동자를 서로 분열시킵니다. 백인이 흑인에게 경제적인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음에도, 최근 반(反)흑인 정서가 커진 배경입니다. 그 결과 노동자 전체의 교섭력은 약화되고, 고용주는 더욱 유리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결국 자본가 계급의 소득은 늘고, 흑인과 백인 노동자의 삶은 함께 가난해집니다. 관용은 인종주의를 강화하며,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인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관용 정신이 자본주의 동기에서 비롯됐음을 간파했습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다른 유럽 도시들과 달리, 유대인들을 게토(Ghetto, 전근대 서유럽 도시에서 유대인을 강제로 거주시키던 구역)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면서, 이베리아반도와 남아메리카를 잇는 광범위한 무역망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중반 유대인은 암스테르담 해외 무역의 15퍼센트를 차지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유대인에게 관용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착취당하는 사람이 관용에 만족하는 건, 마치 싸구려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왕이 된 듯 착각하는 미천한 뱃사람과 같다. 생계를 위해 여전히 세상에 나가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종주의’와 ‘문화주의’를 비교하며, 이러한 관용의 허구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관용이 문화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 전쟁터가 이제 ‘문화주의’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는 줄었지만,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문화주의자가 인종주의자보다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받아들일 때만 동등하게 인정하겠다는 의미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동화되기 어렵고, 결국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난만 듣고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간다. 관용은 세계의 문화적인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우리는 인정해야 할 차이와 인정할 수 없는 차이를 종종 혼동합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면, 차이가 분명한데도 무조건적인 관용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존중한다’는 말은 결국 기존 견해, 즉 지배적인 의견이 틀렸더라도 상대에게 그 견해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셈입니다. 관용은 입증의 책임(burden of proof)이 없는 쪽에만 유리하게 작동하는 게임의 규칙입니다.


이처럼 관용의 비대칭성은 자주 간과됩니다. 관용 담론의 이분법적인 구조는 지배와 종속을 정당화합니다. 관용은 관용 대상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임을 표지(mark)하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되는 순간, 폭력을 미리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관용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다른 문화를 관용한다는 건, 단순히 모든 문화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용은 ‘차이’가 아닌 ‘우위’를 전제합니다.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자존감’에서 찾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기에 자신이 속한 집단을 높이 평가하고, 경계를 넘어선 다른 집단은 낮게 봅니다.


가령 독실한 기독교인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동등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이슬람교보다 ‘우위’에 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 기독교만큼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굳이 기독교인이 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딜레마입니다. 자신이 속한 문화를 우위에 두면서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면, 결국 다른 문화는 열등하다는 전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모든 문화를 완전히 동등하게 본다면,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경계 자체를 허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문화의 ‘다양성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차이를 배려나 관용이라는 ‘인정’의 차원에서 접근해선 안 됩니다. 차이를 만든 원인을 따져야 합니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습니다. 차이를 관용 같은 보편적인 개념으로 환원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 차이를 바탕으로 보편 자체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합니다. 관용을 강조하는 순간, 차이나 우위만 선명해질 뿐입니다. 경계의 이동이나 권력의 비대칭, 이해의 충돌 같은 핵심 문제들은 오히려 무시됩니다. 관용이라는 언어로 갈등을 덮기보다는, 그 갈등을 드러내고 부딪치는 과정에서 비로소 사회 변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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