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관용[똘레랑스]
12장 관용[똘레랑스]
질서는 허위다.
숨길 것을 숨기고 난 후의
묵계에 불과하다.
- 이수영
철학자 볼테르는 『관용론』(1763)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는데, 누가 다른 이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라 강요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후 사회는 개인에게 ‘관용’을 미덕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관용이란 흔히 타인이나 다른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편견 없이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기독교인은 무슬림을, 백인은 흑인을 관용하라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는 개인이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합니다. 문제에 부딪치면, 개인이 스스로 생각을 바꿔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며,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받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문화를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문화는 태도와 믿음이 결합된 것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주입되기 때문입니다. 문화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고, 보통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문화와 같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선 안 됩니다. 개인에게 노력으로 ‘사회적인 힘’을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건, 사회 문제를 은근히 개인에게 떠넘기는 일입니다. 인본주의(휴머니즘)뿐 아니라 관용(똘레랑스) 또한 사람 사이에서 수사적인 무기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똘레랑스[관용]의 전도사로 알려진 사회운동가 홍세화는 프랑스 사회의 유연함, 곧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똘레랑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극단을 피하고,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고립보다 연대를, 힘의 대결보다 대화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홍세화는 사회 문제를 똘레랑스라는 문화로 해결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인종이나 종교, 정치 체제가 다른 이들을 관용하는 정신이 전 세계로 확산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를 자극하거나 증오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요? 홍세화가 수십 년 전 경험한 프랑스와 달리, 오늘날 프랑스인 가운데 관용을 중요한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은 39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관용은 증오와 경멸에 대한 영구적인 해법이 아닙니다. 관용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저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입니다. 단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차이를 만드는 ‘기준’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관용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올바르게 평가받기를 점점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관용을 베푸는 이의 겸손한 태도 뒤에 숨겨진 경멸에 민감해졌습니다. 이제 ‘다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생각해도 좋다’는 식의 관용을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관용 같은 문화적인 접근은 사회 문제 해결에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개인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만 바꿔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토닥이는 관용의 프레임은 자본주의의 폐해나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취약성 같은 근본 갈등을 가린 채, 문제를 감정적인 차원의 ‘관용의 문제’로 바꿔버립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지는데, 관용 담론은 이런 구조적인 모순을 덮어두며 사회 문제를 개인의 태도 문제로 둔갑시킵니다. 겉으로는 진보적이고 의식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사회 문제는 개인의 의지나 태도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관용을 숭상하는 사회에서는 갈등이 무조건 나쁘고 위험한 일로 치부됩니다. 관용은 갈등 상황에서 늘 역지사지나 양보를 요구합니다. 관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질서와 조화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니라, 문제를 따져보고 저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갈등을 피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갈등을 외면하면 사회적인 모순이나 불평등 같은 근본 문제가 가려집니다. 갈등은 중요한 문제를 드러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물론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 양보하고 화해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관용 사상이 만연하면, 갈등을 단지 병리적인 상황으로 치부하고, 양보로 봉합하려는 데만 급급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기계적인 관용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의 관용은 논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틀린 생각마저 다양성이나 취향으로 포장하는 순간, 관용은 탈정치적이고 무의미한 말로 전락합니다. 입장이 충돌할 때마다 획일적으로 중간에서 타협하는 태도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겉모습만 치유하는 시늉에 불과합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관용뿐 아니라, 불의에 맞서는 용기도 인간의 중요한 의무로 가르쳐야 합니다.
파블로 피카소 <눈물 흘리는 여인>(1937)
피카소는 아프리카 예술을 ‘이성적인 예술’이라 평가했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생각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영향을 받아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그 모든 시점을 동시에 화폭에 담았습니다.
피카소는 사물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져도, 그 구조가 짜임새의 원리에 따라 유지된다는 점을 그림으로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한 방향에서만 대상을 보면, 그 시점에서만 부분적으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