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 11장 인본주의[휴머니즘]

by 북다이제스터



우리가 동물이나 식물을 단순하고 열등하다고 여기며 지배하려 든다면,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물리학자 김상욱(1970~ )은 우리의 편견을 꼬집었습니다.


“폭발물 탐지 로봇은 인간을 위해 망설임 없이 위험에 몸을 내던진다. 기계지능이 인간보다 열등한 점이 있다면 욕심이 없다는 점이다. 수많은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란 대개 자아와 욕심을 버려서 도달하는 상태다. 기계지능은 애초에 버려야 할 자아나 욕심이 없다. 기계지능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열반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 대신 이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상상하는 게 지나친 비약은 아닐지 모른다. 더 낫다는 기준에 반드시 인간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슈아 그린(1974~ )은 인본주의가 정말 중요한지, 아니면 단지 우리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본주의는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을 마치 도덕적인 실체인 양 편리하게 합리화하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논증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인본주의는 수사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인본주의에 호소하는 건 논증을 펼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논증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인본주의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서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에서도 수사적인 무기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사회학자 오찬호(1978~ )는 <인간극장> 같은 휴머니즘(인본주의) 방송이 ‘불쌍한 사람들’의 무능한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줄수록, 결국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휴머니즘 이야기에 동정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저러니까 가난하지’라는 고정관념”이 생긴다고 비판했습니다. 작가 정희진 또한 괴로워하는 타인을 보여주는 휴머니즘 방송은 결국 “타인의 불행 위에서 자기 안위를 확인하는 사고방식”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평론가 문강형준(1975~ )은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사회가 사회문제를 개인의 ‘인간’ 문제로 둔갑시켜, 사람들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휴머니즘 다큐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 삶의 의미를 일깨우려고 한다. 이런 ‘일상의 행복’을 선전하는 프로그램은 일말의 진실은 있을지 몰라도, 삶의 잡다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를 싸잡아 모두 ‘마음의 변화’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메시지야말로 힘든 세상 문제를 그대로 둔 채 정신의 변화만 강요해, 개인을 자기만의 가짜 행복에 빠지게 만드는 아편과 같다. 모든 문제를 오직 마음의 문제로 환원할 때, 결국 사회와 인간의 분리만 가속될 뿐이다. 행복은 개인의 결단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머니즘 같은 ‘인간적인’ 접근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사회 문제의 구조나 맥락을 외면한 채, 개인이 마음만 고쳐 먹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 )은 이런 식의 휴머니즘이 지배계급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통치 전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인간의 본성이나 역사의 합리적인 진보, 자연에 대한 인간 이성의 점진적인 승리 같은 믿음이 모두 자본주의에 내재한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사이비 인본주의로 그 정체를 드러냈으며, 그 인본주의는 결국 계급 권력과 사회 특권층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테르 브뤼겔 <장님을 이끄는 장님>(1568)



브뤼겔의 만년작 <장님을 이끄는 장님>은 <마태복음> 15장 12~19절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빌려,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풍자합니다.

이런 묘사는 당시 인본주의를 비판하는 그림에서 자주 등장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로 믿으며 진리를 인도한다고 자처할 때, 브뤼겔은 그 모습을 ‘눈먼 자들의 행렬’로 그려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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