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잊고 살던 어둠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제목은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지만,
이 책을 처음 펼쳤던 순간 나는 성지보다 더 낡아 있던 건 사실 내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세스지라는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긴키 지방을 무대로 했던 데뷔작이 영화화될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도,
그가 일본 호러의 풍경을 아예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도 익히 들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조금 달랐다. 읽기 전부터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함이 가슴 안쪽에 고여 있었고,
그 불길한 기운은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또렷해졌다.
책을 여는 순간 만난 것은 유령 이야기였다. 시시한 듯하면서도,
무서운 듯하면서도, 결국 우리 일상 어딘가에 붙어 있을 법한 흔한 유령 이야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유령의 그림자가 내 삶의 어떤 틈새와 정확히 겹쳐 보였다.
그건 사건이라기보다 ‘감정의 잔상’에 가까웠다.
누군가에게 질투했던 기억, 설명할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혔던 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도 태연했던 순간.
세스지의 문장은 그 어두움을 너무 솔직하게, 너무 날것의 상태로 들이밀었다.
작품 속에는 한 장면이 있다.
젊은 네 사람이 어둠이 깃든 장소에서 놀이처럼 벌인 의식.
누군가의 장난, 누군가의 호기심, 누군가의 겁먹은 손끝.
그리고 아주 가벼운 질문 하나.
그 질문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동전 하나가 미끄러지듯 움직인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누군가는 놀랐고,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도망쳤고, 누군가는 외면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그 ‘가벼운 의식’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되었다.
어쩌면 공포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유령이 아니라, ‘내가 놓아버린 순간’에서 시작되는 것.
책 속 인물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상 현상보다
거기서 낳은 감정 때문에 더 크게 무너져 갔다.
질투.
증오.
집착.
불안.
우리는 그런 감정을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끌어안고 산다.
세스지는 그걸 아주 정확하게, 숨길 틈도 없이 꺼내놓았다.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속 ‘성지’가 더럽혀진 게 아니라
그곳을 찾아든 인간의 마음이 이미 더럽혀져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무엇을 봤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보았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공포는 자극적인 사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서 피어나니까.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XX의 이야기는 특히 오래 남았다.
의식을 벌였던 친구 중 한 명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그 흔적을 쫓아가다 문득 발견하게 되는 뉴스 기사.
텅 비어 있다고 말했던 그 아이의 마지막 소식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너무도 허무했다.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하려는 마음과
어쩐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직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은 혼잣말을 한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어쩌면 그 말은 공포에서 도망치기 위한 최소한의 여유였고,
어쩌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의 비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대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애써 농담처럼 말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릴까.
두려움을 인정하는 순간,
내 안의 어두움까지 함께 드러날 것 같기 때문일까.
책을 덮고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성지란 사실 누군가에겐 성스럽고, 누군가에겐 무섭고, 또 누군가에겐 그저 폐허일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성지를 더럽히는 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그 더러움은 사람 사이를 타고 번지고,
결국 스스로에게 다시 돌아온다.
세스지가 보여준 공포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어두운 심연’이 어떻게 형태를 얻고,
어떻게 인물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며,
어떻게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지를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유령이 아니라,
‘내가 외면하고 지나쳐 온 것들’이라는 사실을.
그건 관계 속에서 흘려보낸 말 한마디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지지 않으려고 다급히 감춰둔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그때는 모른 척했지만 지금은 생생히 떠오르는 장면들일 수도 있다.
공포는 결국, 마음이 더럽혀지는 순간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세스지의 작품을 읽고 난 뒤,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말이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넘겼던 순간.
사실은 나 역시 그 상대에게 무심하고 잔인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래 지나서야 깨달았던 기억.
그 기억은 유령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결국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정말 괜찮았던 거냐고.
그때의 너는 지금의 너에게 어떤 그림자를 남겼느냐고.
책 속 인물들이 마주한 ‘더럽혀진 성지’는 결국 낯선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안쪽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문장들 사이에서
한동안 잊고 있던 마음의 폐허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작품은 무섭지만, 동시에 슬프다.
잔인하지만, 솔직하다.
자극적이지만, 어쩐지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 공포는
언제나 사람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건 유령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그리고 그래서 더 무섭다고.
당신은 어떠신가요?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아직 닫지 못한 작은 성지가 남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