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메디치 가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기 이틀 전, 1534년 9월 23일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 미켈란젤로는 1533년에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뒤의 벽에 <최후의 심판>267을 그리기로 계약했고, 1536년 5월에는 그것을 그리고 있었다. 계약 후 바로 작업이 시행되지 않은 것은 기존의 프레스코화의 회반죽을 제거하고 창문도 부수어 공간을 확보하는 문제와 교황 바오로 3세의 즉위 문제가 해결되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테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아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부활의 시기에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고딕의 냉혹한 수확자가 낫으로 건초를 자르듯 인간을 잘라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구원에서 더 멀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산 자는 좀 더 용서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오에 의해 성난 구세주의 발 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하게 만들었고 그의 시에서도 표현되었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자극에 매우 민감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운명은 미켈란젤로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는데,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에서 교회의 부패와 메디치 가의 전제에 반대해서 종교개혁과 신정체제를 시도하다 이단자로 몰려 화형당했다. 미켈란젤로가 한평생 세상사에 거리를 두고 지낸 것은 바로 이런 경험 때문임이 틀림없다. 나이가 들수록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열광적·비타협적·독단적이 되었고, 결국에는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어, 그가 지녔던 르네상스적 이상을 축출하고 자신의 전 창작 활동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까지도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최후의 심판>은 분명히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한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더 이상 완성과 힘과 젊음의 기념비가 아니라 곤혹과 절망의 표현이며 갑자기 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혼돈으로부터 구원을 갈구하는 심약한 영혼의 부르짖음이다. 이 작품은 세상과의 관계가 편하지 않아 안정감을 상실한, 세상과는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물리적 세계의 가시적 미를 직접적으로 표상하지 않았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만 해도 물리적 세계에서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되는 형상을 묘사했으나 <최후의 심판>에서는 목적하는 바가 달라졌다. 이 작품에서 그의 누드는 두껍고 우아함이 결여되어 있으며 무겁고 무기력하게 보이며 더 이상 물질적인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물질적인 미를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 혹은 정신 상태를 드러내보이는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실제의 공간이나 원근법, 전형적인 비례조차 무시된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작품을 좋아한 사람들이 보고 질겁할 만했다. 미켈란젤로가 1530년대와 40년대 초에 쓴 시에는 미와 사랑에 관한 사고가 표현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물질적인 미는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사랑은 완전한 만족감을 주지 못하며 정신에 대한 사랑보다 품위가 떨어진다고 보았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의 부분; 바르톨로메오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_그리스도 바로 아래 왼쪽에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로렌스가 석쇠를 들고 있다. 오른쪽에는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가 오른손에 칼 왼손에 살가죽을 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축 늘어진 살가죽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자신을 지옥 위에 매달린 보잘것 없는 존재로 표현했지만 성인의 손에 잡혀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죄를 고통스럽게 여기게 했고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1535년 9월 1일 반포된 모투프로프리오motuproprio(교황의 사적인 포고령)로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최고 건축가·화가·조각가로 임명되었으며 <최후의 심판>267에 집중하기 위해 그동안 연기했던 많은 작업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콘디비는 클레멘스 7세가 궁리 끝에 <최후의 심판>을 시스티나 예배당에 장식하기로 결정했다고 적었다. 이로 인해 모세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표현한 페루지노의 작품들과 미켈란젤로가 제작했던 두 반월창이 사라졌다. 가장 큰 손실은 페루지노의 제단화 <성모 승천>이 사라진 것인데, 원래 이 예배당은 승천하는 성모에게 봉헌되었던 교회이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원래의 예배당 장식이 지닌 일관성을 크게 손상시켰다.
이 작품은 1541년 10월 31일 ‘성자들의 밤’에 공개되었다. 전통적으로 지상과 지옥은 아래, 천국은 상단에 위치하며 죽은 자는 그리스도의 오른쪽, 저주받은 자는 왼쪽에 서게 된다. 이 작품은 이러한 구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를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어서려고 하는 모호한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스도의 다리는 <모세>213의 다리를 반대로 한 것처럼 보이고, 상체는 <부활한 그리스도>225와 닮았으며, 수염은 없고 배에 우람한 근육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일어서서 저주받은 자들을 지옥으로 던지려는 모습으로 이해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보아 저주받은 자들이 모두 지옥으로 빠지기 전에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성모는 그리스도의 둥근 광채 안에 앉아 있다. 미켈란젤로는 <십자가 처형 드로잉>279에서도 성모를 이렇게 움츠린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리스도는 사도와 성인들에 에워싸여 있다. 사도와 성인들은 아래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크게 묘사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래서 올려다볼 때 비례를 조절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의도적으로 크게 부각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축복받은 영혼들로 하늘나라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군대를 이루는 이들에게는 죄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하단 맨 끝에 당나귀 귀를 한 미노스가 뱀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뱀이 그의 몸을 휘감고 그의 성기를 물고 있다.267-3 카론Charon(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 강Styx의 나루터지기)은 성난 모습으로 노를 들어 운명이 정해진 영혼들을 위협하며 자신의 보트에서 쫓아낸다.267-5 최후의 심판을 받은 영혼들은 불구덩이 지옥의 낮은 곳으로 떨어지도록 저주를 받았다.
거대한 벽화 하단 왼쪽에는 무덤으로부터 죽은 자들이 살아 나오고, 가톨릭의 교리대로 뼈들은 몸을 만나 부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267-4 부활한 몸은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승천하지만 프레스코 반대편을 보면 저주받은 자들은 과격한 물리적 방법으로 지옥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지옥은 부분적으로 단테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인간의 추락에 관한 표현에서 그의 상상력도 작용했다.
하우저는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완전히 내바치고 속세적·육체적·육감적인 일체의 것을 자신 속에서 용해 소멸시키려는 욕망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고 적었다. 르네상스적 구도에서 보이는 화면의 공간적 조화는 사라지고 대신 비현실적·비연속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기준에 의해 구성되어 있지도 않으며 통일적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투시도적·환영주의적 효과를 버리고 하단의 인물들에 비해 상단의 인물들을 너무 크게 그렸다. <최후의 심판>은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최초의 근대 작품이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표현이 풍부했던 중세의 작품과는 유사한 데가 있다. 하우저는 이 작품을 아름답고 완전무결한 형식에 대한 매우 힘들여 얻은 항의이자 일종의 선언이며, 그 선언의 형식 무시 자체는 공격적이고도 자기파괴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