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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18. 2016

01.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

가장 쉽고 빠르게 배우는 방법

“배움은 질문으로 열 수 있는 보석상자다.”

- 아라비아 속담


  누구나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일이 있다. 그것은 ‘왜 사는가?’하는 삶에 대한 고민이다. 굳이 철학자가 아니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나는 누구나 ‘삶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이런 고민의 과정이다.


  이것이 청소년기의 특징이라고 배운 기억이 있지만, 나는 아직도 매일 이런 고민에 휩싸인다. 물론 십 대의 고민과 지금의 고민은 다르다. 그때는 주로 삶의 목적을 고민했다면, 사십 대 후반이 된 지금은 그것을 향해 하루하루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고민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목적지가 어쩌면 잘못 설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하고,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인지도 고민한다. 그리고 지금의 속도로 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고민한다. 다시 돌아가 확인할 일이 없는지도 고민한다. 하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맞지만, 고민의 크기와 강도, 심지어 내용도 다르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러분도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왜 사느냐?’가 그 주제이다.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목적 없는 삶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보여주는 마음 아픈 내용이다.


  “공부는 왜 하지?” 

  “취직하려고요.” 

  “취직은 왜 하지?”

  “돈을 벌어야지요.”

  “돈은 벌어서 무엇을 하려고?”

  “집도 사고 결혼해서 애들도 키워야지요.”

  “그래서?”

  “회사에서 임원이 되겠지요.”

  “임원이 된 다음은?”

  “정년이 되어 퇴직하겠지요.”

  “그다음은?”

  “번 돈으로 안정된 노후를 보내다가…….”

  “그러다가?”

  “죽겠지요.”

  “그럼 죽으려고 사는 건가?”

  “……”


  이 간단한 이야기로 얻을 단 한 가지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목적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삶의 목적을 다르게 표현하면 무엇이 될까? 그것은 ‘꿈’이다. 이것은 삶의 목적이자 목표이고 때로는 목적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꿈은 ‘취직’이나 ‘돈’처럼 삶의 수단이나 경유지가 될 수 없다. 수단을 목적과 혼동하면 위 이야기처럼 죽기 위해 사는 인생을 만들 위험이 크다.


  혹시 여러분 중에 ‘꿈’과 ‘수단’이나 ‘경유지’가 구분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인생을 여행이라고 가정하자. 우리가 일생을 통해 가야 할 곳인 ‘꿈’을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이라고 하자. 가는 방법인 ‘수단’은 항공기나 선박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고, 항공기를 선택하더라도 직항로를 이용해 로마에서 가는 방법부터 여러 경유지를 거쳐 가는 셀 수 없이 많은 방법도 있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꿈’의 내용과 관련된다.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 오로지 ‘꿈’의 내용 전부라면 어쩌면 로마로 가는 직항로를 선택해 항공기를 이용하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을 활용하면 될 일이다. 그러려면 ‘돈’을 모으는 수단을 우선 선택하고 그에 맞는 이동 수단을 설계해야 한다. 그러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건축과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꿈’이라면 이 방법은 어쩌면 최악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장소만 이동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성당은 1296년 착공해 1359년에 거의 완공되었으나, 정탑을 완성한 것은 1436년이었으며, 서쪽 정면은 1887년에 완성되었고 아직도 미완성인 부분이 있다. 이 성당 세례당의 출입문에는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가 27년간 조각한 「천국의 문(Porta del Paradiso)」이 있으며, 제실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피에타(Pieta)」 상이 있다. 물론 이 작품들도 건축 일부다. 이렇게 이 성당에는 거의 천 년의 역사가 담긴 수많은 예술작품이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이 성당을 통해 ‘건축과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이루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 건축, 역사, 예술, 사상, 철학, 종교 등을 공부해야 한다. 물론 여행에 대한 공부도 필요할 것이다. 이 퍼즐을 맞춰가는 것이 인생이다.


  ‘건축과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인생의 목표를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이 목표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여러분도 여러분의 꿈에 대해 생각해보라. 과연 꿈이 있는지부터 생각해보라. 있다면 그 꿈이 진짜 꿈인지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단순히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은 아닌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진짜 꿈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꿈을 인생으로 바꿀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꿈이 아니다. 일 년, 십 년에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 역시 인생을 걸고 도전할 꿈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꿈이 빛난다. 남들처럼 하거나, 남도 할 수 있는 일은 이루더라도 인생이 빛나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라면 그 이름이 ‘꿈(Dream)’이 아니어야 한다. 꿈은 미지의 세계다. 그래서 인생을 걸고 갈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남들이 정복한 땅에 오르는 것은 그저 관광이나 견학이다. 인생이 관광이나 견학이 되길 원하는가?


  그래서 ‘꿈’을 만드는 일은 어렵다. 초등학교 4학년에 확고한 꿈을 만들고 노력하면 좋겠지만, 평범한 우리에게 이것은 좋지도 쉽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청년이 될 때까지는 많이 부딪혀 경험하고 열심히 탐구해서 자신의 소질과 결합하는 일이 중요하다. 100년을 살며 이루어야 할 일을 열 살 때 만들라는 것은 가혹하기도 하고 좋은 방법도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험’하는 일이고, ‘탐구’하는 자세고, 소질을 ‘발견’하는 노력이다. 그러려면 단 한 가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모른다는 생각, ‘무지(無知)’로부터의 출발이다. 어차피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났다. 세상으로 나간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태어났다. 그저 더는 어머니 몸에서 커진 몸의 양분을 공급받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만 알고,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그렇게 엉엉 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지’가 불편하고 사는 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의 역사가 모르는 것이 편한 쪽으로 흐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무지’는 점점 불편을 넘어 ‘창피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무지’가 ‘창피한’ 일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앞서 말한 대로 ‘무지’에서 태어난 것은 누구나 같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아무리 공부해도 ‘무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그 이유다. 박사(博士)가 된다 해도 그것은 그 분야, 그 분야 중에서도 자기 연구에 한정된 이야기다. ‘건축과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건축이나 종교, 건축과 종교를 공부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두 무지의 세계다. 그리고 알아야 할 대상은 무한의 세계다. 뭘 좀 안다 하더라도 알아야 할 것이 무한의 세계이니, 뭘 좀 모른다고 뭐가 그리 창피한 일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무지의 지(知)’를 말하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유일하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하며 자신조차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아는 척’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명확히 같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은 무지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평생에 걸쳐 노력했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깨우침은 왜 중요할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도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 것 같다거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며 그것을 ‘아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다음의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이 두 번째 이유다. 이렇게 되면 당장 공부할 기회를 허공에 날리게 된다. ‘아는 것’이 되어버린 ‘모르는 것’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식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강연에서, 회의에서, 심지어 친구와의 대화에서조차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잠시나마 머릿속에 떠올려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보라. 소크라테스가 웃음 짓는 이유이며, 우리가 무지를 인식해야 하는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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