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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24. 2016

02. 모르는 것, 아는 것, 이해한 것

이해한 것은 행동한다는 의미다


“때로는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때 더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 말콤 포브스(Malcolm Forbes)


  ‘모르는 것’을 ‘아는 것(Knowing)’으로 바꾸는 방법이 이 책의 주제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실 나는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항상 생각한다. 지금까지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하고는 왜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일까?


  다른 이야기를 먼저 생각해보자. ‘아는 것’은 어디에 저장될까? 우리가 ‘아는 것’의 범주에 편입한 지식이나 경험은 근육의 기억으로 저장되기도 하지만, 주로 머릿속 시냅스(Synapse)의 끝자락 뉴런(Neuron)에 신호로 저장된다. 좌뇌(左腦)에는 논리, 언어, 수리, 추리와 같은 이성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기억이 저장되고, 우뇌(右腦)에는 음(音) 인지, 미(美) 인식, 상상(想像), 차원적(次元的) 사고, 통합적(統合的) 사고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기억이 저장된다.


  그렇다면 기억에 저장된 신호들은 어떤 형태로 재생될까? 그것은 언어와 이미지다. 한번 생각해보라. 10년 전 헤어진 친구의 얼굴이나 말투를 떠올리면 무엇이 머릿속에 나타나는가? 친구의 얼굴이나 행동은 이미지로 나타나고 말투는 실제 소리처럼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떠오른 행동은 움직임이 있든 없든 분명히 이미지다. 또한, 말투는 소리로 전환되지는 않았지만 언어다. 그 외의 것이 있는가? 기억에 포함된 느낌과 같은 것이 있지만, 그것은 우뇌에 저장된 감성의 기억일 뿐이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경험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아는 것’은 경험이든 지식과 같은 것이든 언어와 이미지의 한 가지 형태, 혹은 두 가지 형태로 동시에 저장된다. 그런데 이것은 뇌에 저장된 상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관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된 세계에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결국, 자신의 머릿속에 든 ‘아는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타인의 관점에서 ‘모르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저 누군가의 머리에 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세계의 변화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아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아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확히 옳다. 그저 ‘아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심지어 자신조차 변화시킬 수 없다. 머릿속 시냅스를 따라 수많은 저장소에 엄청난 양의 기억을 만들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려면 머릿속의 기억을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바꾸어놓아야 한다. 즉, 관념의 세계에 기억으로 존재하던 것을 실존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그때까지는 ‘아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아는 것’은 왜 필요한 것일까?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아는 것’을 늘려가야 할까? 그리고 ‘아는 것’을 세계에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행동’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인식하면 바로 그것을 ‘아는 것’으로 바꿔야 하고, ‘아는 것’은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행동이 없는 ‘아는 것’은 뇌의 용량만 축낼 뿐이다.


  ‘아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Understanding)’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해한다.’는 것은 아는 대로 행동하고, 그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진정으로 아는 것’은 ‘행동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부분 시간이 필요하다. 이해하기 위한 시간 말이다.

  꽃을 커다랗게 그렸던 유명한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미국 위스콘신 태생이다.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와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 New York)에서 공부한 그녀는 꽃이나 짐승의 뼈, 식물의 기관 등을 실제 보이는 것보다 아주 크게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유명한 그림으로는 「검은 붓꽃(1926)」, 「천남성(1930)」 등이 있는데, 200점도 넘는 꽃 그림 중에 꽃 하나를 다 그린 그림이 한 점도 없다.


  오키프는 화가들이 찾아와 그림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고 회고한다. 질문의 핵심은 “왜 그렇게 꽃을 크게 그리느냐?”는 것이었다. 오키프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그럼 당신들은 강이나 산을 그리는 화가에게 실제보다 왜 그렇게 작게 그리는지 물은 적이 있는가?” 그녀에게 그림의 대상은 이해의 대상이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눈이 있어야 했고,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친해질 시간도 필요했다. 과학자들이 무언가를 발명하고 발견하기 위해서 미생물과 친해지고 심지어 기계와 친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그녀의 그림은 심미적인 해석이 더해져 꽃의 생물학적 외형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입혀졌다. 꽃에 대한 그녀만의 ‘이해’가 더해진 셈이다.

  오키프는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키프를 찾았던 화가들은 그녀가 왜 그렇게 꽃을 크게 그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알지도 못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모든 것을 대한다. 지식도 친구도 가족도 마찬가지다. 오키프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자. “아무도 꽃을 보지 않지. 꽃은 너무나 작아서 우리는 꽃을 볼 시간이 없어. 그런데 말이야, 친구를 사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거든.”


  ‘아는 것’과 ‘이해한 것’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아는 것’은 그저 시냅스를 따라 기억의 저편에서 무언가를 꺼낼 수 있다는 의미지만, ‘이해한 것’은 ‘아는 것’을 행동으로 바꿔 자기 신체의 일부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의 학교 교육을 돌아보자. 우리가 배운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목표였을까, 아니면 ‘이해한 것’이 목표였을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그저 아는 데 필요한 작은 용기가 아니다. 이것은 아는 것을 넘어 진정한 이해에 도달해 행동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용기다. 물론 행동의 시기는 현재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행동은 꿈을 만들어주고 꿈을 이루게 해줄 것이다. ‘이해’는 꿈에 연결된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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