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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26. 2016

03. 진짜 누드를 그린 남자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공부의 출발이다


“사람들의 문제는 진실의 영역이 언제나 그들의 환영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예술가들의 예술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화가든 음악가든 시인이든 조각가든 건축가든, 그들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쌓아올리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시인은 시로, 조각가는 조각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이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정작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일부만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세계를 표현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 본다 한들 보일 리가 없다. 봤다면 어쩌면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2007년 겨울, 우리나라 최고의 바리톤으로 불리는 김동규 성악가와 예술과 창조성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음악가들이 만드는 세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대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떠오른 심상을 소리로, 몸짓으로, 악보로 표현해내는 거죠. 하지만 떠오른 것을 그대로 다 표현할 수는 없어요. 작곡가가 작곡한다고 하면, 그걸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음표와 같은 규칙이 전부예요. 음표로 그려봐야 실제로 떠오른 것과 비슷한 것일 뿐이지요. 표현할 방법도 그것이 전부고요. 그조차도 다음 날 아침이면 우스꽝스러운 작품에 지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공부하고 다시 만들고, 계속 만드는 거예요. 비발디의 ‘겨울’ 2악장은 부르기 쉽죠. 하지만 이것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헤아릴 수 없죠.”


  앞선 사례처럼 캐머런 감독은 「아바타」를 제작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정말 많았다고 회고한다. 그와 함께 공부하고 연구한 사람들은 그가 아주 완벽해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김동규 성악가의 인터뷰 내용과 같은 얘기다. “그래서 공부하고 다시 만들고, 계속 만드는 거예요.” 공부하는 방법은 차이가 있지만, 목적은 같다. 모르는 것을 채워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니까.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1912)」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작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하체를 중심으로 한 연속적인 움직임’을 그린 작품이다. ‘누드’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벗은 모습을 그린 그림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림을 본 순간, 나의 온 신경은 ‘누드’에 집중되었다. 그림의 이미지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인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누드’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누드(Nude)’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누드는 ‘회화, 조각, 사진, 쇼 따위에서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이며, ‘미술에서 인간, 신, 악마 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표현한 회화’로 정의된다. 왜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작품에 ‘누드’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실제 작품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에서 상징적인 무엇인가를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면 알 수 있다. 도대체 마르셀 뒤샹은 무엇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이 작품은 출품 단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신진작가들에게도 자유롭게 개방된 앙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에 출품하려 했을 때는 ‘정숙하지 못한 웃기는 그림’이라는 평가와 함께 출품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그림에서 과연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누드’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고 출품을 거절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 그림은 계단을 내려오는 인체의 모습을 2~3초 정도의 스틸 컷으로 담아낸 그림이다. 하반신을 중심으로 그려서 머리는 보이지 않으며, 그려진 부분도 하반신의 모든 부분이 아니라 관절과 근육이다. 그러니까 관절과 근육만을 그려 작품을 만든 것이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이 보고자 한 관절과 근육만을 본 것이며, 본 것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가려진 모든 부분을 다 제거한 관절과 근육을 그린 인체 그림에 어떤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인체에서 가려진 부분을 제거하고 드러난 부분을 그린 그림’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정확하게 ‘누드’다. ‘누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다른 용어를 생각해보라. 누드보다 더 명쾌한 단어는 없다. ‘가려지지 않은 인체를 그린 그림’이 누드이고,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르셀 뒤샹은 영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사진을 오랜 시간 연구했다. 연속 동작 사진기술을 발명한 그는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의 사진을 연속 촬영하기도 했다. 트랙의 뒤에 하얀 배경을 만들고, 정확하게 1피트마다 카메라를 설치한 후 실로 셔터를 연결해 말이 지나면서 실을 끊으면 사진이 찍히도록 했다. 이렇게 얻은 12장의 스틸 사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동작의 변화를 완벽하게 담아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생화학자 폴 리셰(Paul Richer)의 인체 스케치 등을 연구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움직임과 실제 움직임의 명확한 차이를 알려고 했다.


  이런 노력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다. 사실 이 작품에는 더 놀라운 한 가지가 숨어 있다. 어쩌면 그림에서 본 머이브리지의 사진과 폴 리셰의 인체 스케치를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캔버스에 시간을 담았다는 것이다. 인체가 움직이는 몇 초를 평면의 캔버스에 그려낸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이전까지의 그림은 정물이든 풍경이든 인물이든 신화를 그린 그림이든 움직이지 않는 정지된 시간을 그렸다. 그 어떤 화가도 움직이는 특정 시간을 그림으로 옮겨놓지는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움직임을 평면의 이차원에 담은 그림은 마르셀 뒤샹이 처음이었다. 소재조차도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이었으니, 이보다 독특한 소재는 생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머이브리지의 사진이나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와 같은 그림은 과학과 산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연속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사진 기술이나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이 산업의 영역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의 사진이나 그림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 이차원에서 움직이는 이차원, 삼차원으로 살아났다. 여러 장의 사진과 그림이 연결되어 살아있는 듯 실감 나는 동작으로 탄생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나 머이브리지와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는 우리 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 뒤샹은 머이브리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과 그들의 작품에 물었다. “관절과 근육도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평면에 시간을 담는 것은 불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왜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담아내지 않았는가?” “가려진 것들을 제거하고 그린 인체가 누드인가, 아닌가?” 마르셀 뒤샹은 누구보다도 잘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잘 공부하기 이전에 자신이 부족한 것,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왜 그런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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