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시대>
가끔 사람들은 이 세상이 거대한 세월호 같다고 말한다. 언론이 전하는 소식들을 듣으면 우리 모두가 서서히 침몰해가는 세월호 안에 있는 듯하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삶의 조건들은 비극적인 소식들을 계속 만들어낸다.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직장을 잃고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좀도둑질을 한 사람들, 온갖 비인간적인 모욕과 모멸 앞에서도 고개 숙인 채 모욕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들의 불행이나 슬픔에 자신이 보탠 것은 없는지 생각한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나서 사람들을 가장 경악하게 한 것은 최초의 슬픔과 망연함 이후로 급격하게 달라지던 민심이었다.
TV 생중계로 그 거대한 비극을 온 국민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느낀 것은 죄책감이었다. 대부분의 희생자가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 어른들은 무한한 책임을 느꼈다. 기업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과적을 하느라 안전과 직결된 모든 조건들을 무시했고, 비정규직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책임을 생각하지 못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했던 관리자들은 책임지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결정을 미루기 바빴다. 21세기, 경제 선진국의 위상을 자랑하던 대한민국이 감춰왔던 모든 치부들이 환히 드러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겹다’, ‘시체 장사 한다’, ‘보상금이 얼마라던데, 로또 맞은 거 아니냐’는 등의 이야기들이 오갔다.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던 유가족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는 폭식 투쟁이 열리면서 각박함은 절정에 이르렀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이런 일이 가당키나 한 건지, 온 사회가 경악했다. 한국 사회가 비인간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감정이다. 특히 수치심은 타인이 내게 기대하는 것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으로,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자아를 가져야만 느낄 수 있다. 사회적 유대가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인간의 경우, 사회화 과정에서 양심과 상식이 내면화되면서 일종의 도덕률이 생긴다. 이 도덕률이 사람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다.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벌어진 폭식 투쟁을 보면서 우리는 수치심을 망각한 한국 사회의 일면을 보았다. 사실 이전부터 징후는 있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조롱하고 멸시하는 일들은 숱하게 등장했다. 소비자라는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며 판매원에게 온갖 모욕을 가하는 사람들, 사용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비상식적이고 가혹한 요구를 강요하는 사람들, 돈이 없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온갖 모욕을 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봐왔다.
처음 느끼던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수치심과 죄책감은 점차 무뎌졌다. 삶이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수렴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 타자와의 관계를 힘의 우열로 가늠하는 습관,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어우러져 벌어진 일이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자기 존재의 부정과 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모멸감은 생명만큼 중요한 자존감을 파괴한다. 역설적이지만 죄책감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타인의 불행과 모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나의 방관이 타인을 아프게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기 위해 인간에게는 감정이 필요하다.
2016년 여름, 세월호 대학생 도보 순례가 있었다. 생존 학생들도 목포 신항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 순례를 했다. 팽목항에 도착해 바다를 보던 정원이는 말했다.
“아직 다 기억나요. 단비, 도언이, 나라, 소연이, 수경이, 시연이, 영은이, 주은이, 지인이, 영란이, 예슬이, 지우, 지은이, 채은이, 지숙이, 소희, 예은이, 혜원이, 지민이, 주희, 영수, 예진이, 윤민이, 은지, 지현이.”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