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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1. 2016

01. 두고 온 나를 찾아 떠나는 '거꾸로 여행'

<여행의 이유>

당신 만나러 가던 그날처럼


초행

처음 아닌 길 어디 있던가

당신 만나러 가던
그날처럼



첫길은 언제나 설렌다. ‘당신 만나러 가던 그날처럼.’ 처음 눈빛을 주고받는 순간의 그 황홀한 떨림이라니! 설레는 길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가 ‘당신’이다. 그 아련하고도 그리운 이름 속에는 ‘나’도 있다.

한때 세상의 첫길은 다 새로웠다. 여행지의 풍경들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낯익은 길이 오히려 새롭다. 오랫동안 내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던 길들이 어느 순간 오래된 기억의 굽이들을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길을 언제 걸었던가. 낭창낭창한 허리를 감아 돌면 꿈같이아득한 해안길이 펼쳐지겠지……. 두고 온 추억들이 바닷가 몽돌밭처럼 달그락거리는 그곳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나를 다시 만난다. 새 길을 찾아 무수히 떠돌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다시 찾아 나섰다. 내가 잊어버렸던 본래의 길, 너무 익숙해서 되레 낯설었던 애초의 길. 그것은 모든 상상력의 원천인 모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내 고향 남해를 자주 찾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젊은 날 수없이 떠났던 길 밖으로의 여행 대신 길 안쪽의 나를 찾아가는 ‘거꾸로 여행’. 그곳에 잃어버린 내가 있고, 해 지는 쪽으로 휘어지는 새 길이있고, 둥근 바다에서 솟아나는 곡선의 시가 있으니, 거꾸로 가는 여행은 곧 내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는 모천회귀의 길이기도 하다.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물미해안의 속살을.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남해 물건방조어부림에서 아름다운 미조항까지 이어지는 삼십 리 해안길.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해안선이 여인의 알몸처럼 눈부시고, 미풍이 그 아름다운 곡선을 타고 흐르는 모습…….

ⓒ김경우 남해 소매물도



이 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가는 동안 내 마음은 어느새 문학청년 시절로 돌아간다. 초심初心의 뿌리가 만져지는 시간이다. 유목민처럼 떠돌던 사람이 농사 짓는 정착민의 마음을 찬찬히 되새겨보는 것과 닮았다.

내가 이곳에 각별한 느낌을 갖는 건 아마도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말부터 우리 가족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의 작은 절집에 얹혀살았다.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처의 고등학교로 떠난 뒤, 어머니는 이제 됐다 싶었던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다. 보살의 품계에서 출가자의 품계로 ‘승진’한 셈이다. 그러고는 이곳 물건리에 있는 미륵암에 자리를 잡았다. 암자는 물건방조어부림 옆의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당연히 방학 때마다 나는 물건리로 ‘귀가’했다.

논둑길을 겅중 뛰며 마당에 들어서다 꾸벅할까 합장할까 망설이던 그 집. 잠결에 돌아눕다 ‘어머니’라 불렀다가 ‘아니, 스님’이라 불렀다가 파도 소리에 선잠을 깨던 절집. 눈을 뜨면 봄처녀 댕기같이 단아하게 웃음 짓는 어머니 실루엣이 아른거리던 그곳.

이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리운 사람의 형상으로 재발견한 것은 나중 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어머니의 입적이라는 개인사도 작용했다. 외환위기 직후 어수선하던 1998년 가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물미해안은 나에게 더 애틋한 의미로 다가왔다.

몇 년 후 이 길에서 시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잉태했다. ‘가을’의 계절 요소와 ‘노을’의 회화 요소를 겹친 화선지 위에 ‘그리움’이라는 감성을 채색했다. 자연이 내 몸에 붓을 대고 시를 써준 형국이었다.

ⓒ김경우 울산 강양항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 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 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가을과 노을과 그리움을 관통하는 상징은 시인 백석의 표현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림이었다. 언뜻 보면 ‘달콤한 사랑’과 ‘관능적인 풍경’의 화음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쓸쓸하고 외로운 거울’ 같은 것이기도 했다. 행간에 젖어 흐르는 물기와 함께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배어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핍이 완숙을 채운다고 했다. 그 깊은 세상 이치를 이곳에서 체득했으니 ‘거기 두고 온 나’를 다시 찾아 나선 끝에 얻은 귀한 깨달음이었다.




고두현

한려해상국립공원 중에서도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남 남해 금산에서 자랐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서정과 서사의 깊이를 함께 아우르는 그의 시는 ‘잘 익은 운율과 동양적 정조, 달관된 화법으로 전통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으며 박목월의 시에 방불한 가락과 정서를 보여준다’
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1988년 〈한국경제신문〉 입사 후 주로 문화부에서 문학과 출판을 담당했고, 문화부장을 거쳐 지금은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KBS와 MBC, SBS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에서 책 관련 코너를 오래 진행했다. 《시 읽는 CEO》를 통해 시와 경영을 접목하면서 독서경영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시에 담긴 인생의 지혜와 일상의 소중함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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