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공부를 넘어 이해에 이르러야 진짜 공부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가는 능력이다.
- 모건 스콧 펙(Morgan Scott Peck)
4) 감각에 지배당하지 말고 감각을 지배하라.
우리는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인식된 세계를 해석하면서 공부한다. 이렇게 감각은 자신과 분리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창이다. 감각 이외에 세계를 공부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 감각이 첫 번째에서 설명한 대로 육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부의 장기는 생존을 위해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데 반해 감각기관은 게으르고 핑계를 만들기 좋아한다.
그런데 만약 감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안 보이고, 안 들리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외부로부터의 입력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이것은 뇌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입력이 없으면 인식이 없는 것이고, 인식할 뇌가 작동하지 못하면 입력도 출력도 불가능해진다. 이것을 의학적으로는 뇌사(腦死, Brain Death)라고 한다.
그렇다면 뇌사와 완전한 인식의 중간 단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감각의 결과가 여기에 속한다. 예를 들어, 노화가 진행되면 감각 능력이 떨어진다. 잘 못 보고, 잘 못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맛을 느끼려면 미각을 수용하는 미뢰(味蕾, Taste Bud)를 거쳐야 한다. 혀와 입안에 분포하는 미뢰는 말 그대로 ‘맛을 느끼는 봉우리’다. 혀의 돌기가 미뢰다. 이 미뢰가 성인은 10,000개 정도 분포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그 수가 줄고 점점 퇴화한다. 노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이 드신 어머니의 미각이 점점 떨어져 짠맛을 덜 느껴 국이 짜게 되는 이유다. 감각이 죽음을 향하는 안타까운 이 현상을 되돌릴 방법은 아직 마땅치 않다.
하지만 감각기관이 정상인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무수히 많다고 해야 정확하다. 책상 위의 클립 하나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면서 ‘클립이 도대체 어딜 간 거지?’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클립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닐 테고, 놓아둔 곳에 분명히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보지도 않으면서 없다.’고 하는 것이다. 뇌가 감각기관에 제대로 명령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이런 경우다.
이런 사람을 관찰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안 본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본다.’는 것은 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찾는 행위인데, 찾으려는 의지가 사라진 상태에서 보이는 것만 인식한다면 ‘안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해서는 잘 공부할 수 없다. 그러니 잘 공부하려면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목적을 갖고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감각이 주는 대로 인식하지 말고 뇌가 확실하게 감각을 지배해야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5) 입체적으로 구조화하고 의식을 확인하라.
입체적으로 구조화하는 능력은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엄청난 능력이다. 아마 상상력에 차원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차원적 선형적 사고를 꿈에 대입해 생각해보자. 30년 후에 베테랑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면, 고등학생인 사람은 비행이나 우주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는 것이 지금의 일이다. 대학에서는 우주개발과 관련된 회사나 나사(NASA)에서 일하기 위해 공부한다. 졸업 후 10년까지는 어떤 일을 하고, 그다음에는 무엇을 하는 일련의 일정이 일차원적으로 그린 꿈이다.
이차원의 평면적 사고로 꿈을 그리면 평면에 그린 지도와 같은 것이 된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계획을 세워보자. 공부해야 할 목록에 기체역학, 천체물리, 항공커뮤니케이션, 컴퓨터공학, 항공법, 비행실습 등 수많은 목록이 나무의 줄기처럼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항목별로 학습 일정과 수준 등이 줄기에 난 가지처럼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을 이차원적으로 눈에 보이도록 활용한 것이 마인드맵(Mind Map)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 삼차원의 입체적 사고다. 평면적 사고를 입체로 확장하는 이 방법은 평면에 줄기와 가지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를 돌면서 공간으로 잎을 확장해 붙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훨씬 더 섬세하고 세부적인 계획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축설계를 하는 사람이나 조각을 하는 사람이 그냥 외형만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 들어갈 철근, 전기배선, 공조장치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설계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입체적으로 설계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결과물을 상상할 수 없다면 실제로 설계도면을 만들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심지어 일차원의 선형적 사고조차 힘들어 뒤죽박죽으로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는 조각을 구상하는 입체적 사고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조각이 평면 예술보다 어려운 것은 삼차원적인 형태에 감응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색맹인 사람보다 형태맹인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차원이 높아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제대로 사고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능력이다. 차원이 높아져 난도가 올라가면 작은 실수 하나가 전체를 망가트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 경우의 수도 엄청나게 많아진다. 건축물을 다 지었는데 내부에 인터넷 회선 설계를 빠트렸거나, 건물에 입주한 후의 최종 하중을 잘못 계산했다면 어떨까? 그래서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식을 확인하는 일이 작업과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의식을 확인하는 능력은 입체적으로 구조화하는 능력만큼 중요하다.
6) 정말로 이해한 것인지 확인하라.
‘이해’와 ‘확인’의 의미를 알아야 위 문장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우리가 뇌에 기억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해’는 아는 것을 완벽하게 활용할 줄 아는 수준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아는 것’을 ‘이해한 것’으로 착각한다. 어학을 전공한 일부 번역가들을 보면 아는 것과 이해한 것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외국어를 전공하고 번역은 잘하지만, 실제로 말을 잘하는 경우는 드물다. 말을 잘하려면 단어와 문법을 아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은 작품을 만들기 전에 수도 없이 조각하고자 하는 대상을 그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기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석고로 형을 뜨기 전에 작업하고자 하는 대상을 수도 없이 그렸다. 작업하는 내 손이 작업하고자 하는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들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입체적 사고는 뇌가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을 직접 만드는 것은 로댕의 손이다. 로댕은 머리가 아니라 작업할 손이 작업 대상을 제대로 이해한 상태인지 확인하기 위해 스케치를 반복했다. ‘이해’와 ‘확인’을 ‘이해’했을 것이다.
‘아는 것’은 그저 뇌의 한구석에 기억 일부로 존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아는 것을 이해한 것으로 만들어야 공부가 완성된다. 머리에 어떤 것을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컴퓨터에 파일로 존재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우리가 원하는 공부는 ‘이해’의 단계이고 그래야만 꿈을 조각할 수 있다.
‘직관(直觀, Intuition)’은 ‘이해’가 커지면 다다를 수 있는데, ‘순식간에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직관으로 알게 된 것은 분석이나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최고의 경지이다. 아인슈타인은 어떤 이론이 직관적으로 떠올랐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에 이르렀는지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이렇게 직관은 명증(明證)적이고 궁극적인 최고의 인식능력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직관이 자라기 위해서는 심오한 ‘이해’가 먼저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7) 아는 것은 알아야 할 것보다 절대 많지 않다.
공부에 끝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공부가 안되거나 공부에 문제가 생긴다. 첫째 이유는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이 결합하여 생기는 문제다. 외부적 요인은 공부의 대상이 너무 많아지고 세분되는 것이다. 알아야 할 지식이 증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아는 지식조차도 빨리 변하는 것이 그 이유다. 내부적 요인은 학습 능력의 노화와 퇴화다.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많아지는데, 학습 능력은 점점 나이가 들며 떨어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둘째 이유는 완전히 내부적인 문제다. 앞서 말한 노화와 퇴화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고 하겠지만, 이 경우는 공부의 의지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의 의지가 없는 상태는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공부가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부의 대상을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다.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처럼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잘못 판단할 수가 있을까?
만약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고 계속 잘못 판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이 무엇이든 공부하지 않겠지만, 공부하지 않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알아야 할 것보다 우월하다는 판단이 깔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뭘 좀 안다고 주변의 것들을 얕잡아보고 알아야 할 대상으로조차 편입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를 자주 보았다. 이런 현상은 많이 공부한 사람에게 더 잘 나타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학습 능력이 노화하면 이 문제가 훨씬 두드러진다. 무엇인가 변화는 인식하지만, 그 변화를 이해하기보다 변화를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아는 과거의 것만 옳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과거가 옳다는 생각, 자신이 공부해 아는 과거의 지식이 옳았으면 하는 기대, 새로운 것을 인정하는 것을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완고함이 깔렸다. 그래서 이들과의 대화는 일방적이고 꽉 막혔고 고집스럽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단 하나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해야 죽을 때까지 계속 잘 공부할 수 있다. 그것은 마지막 일곱 번째 잘 공부하는 방법인 ‘아는 것은 알아야 할 것보다 절대 많지 않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좀 느리게 배우면 어떤가? 학습 능력이 노화한다는 것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않겠는가?
잘 공부하는 일곱 가지 기술을 다시 하나씩 살펴보자.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하나라도 쉬웠다면 모든 사람이 잘 공부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공부해 잘 공부한 것처럼 보이려고 ‘넓고 얕은’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것이 별 쓸모가 없으며, 시간만 낭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그것이 정말 대단해 보인다면 진짜 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짜 나를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한 번의 용기가 아니라 평생의 용기다. 모건 스콧 펙이 말한 용기를 다시 생각해보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가는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