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 내 나이를 잊었다. 아니, 잊기보다는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이를 서로 묻지 않으니 나이가 꽤 있는 사람과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름 대신 쉽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있었다. 선배, 부장님, 선생님, 사장님, 박사님 등등. 하지만 여기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문제는 몇 번을 만나도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발음하기도 힘든 영어 이름을 외우는 건 어려웠다.
어떻게 이름을 외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쓱 내밀고 페이스북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훈훈한 분위기에서 스펠링까지 복습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상대방이 내 프로필까지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일 먼저 비공개로 바꾼 게 생년월일 정보였다.
한국에서 나이는 예민한 정보다. 20대 중반이 되기 전까지는 그게 왜 신경 쓰이는지 몰랐지만 어느 순간 주변에서 경고 알람을 켜줬다. 나이별로 완수해야만 하는 퀘스트가 정해져 있었다. 26살에는 대학 졸업하고 경력 쌓기 시작해야지. 29살에는 좋은 사람과 연애하고 있거나 결혼해야지. 결혼하면 애 낳고 집 살 생각하며 돈 모아야지. 30대에 다시 공부를 한다고? 간도 크네.
그러나 캐나다 사람들은 정말 상대방의 나이가 알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예의상 묻지 않는 건지 대부분 나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대화 내용은 점점 개인적인 이야기로 무거워지는데 신기하게 나이는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너, 내 나이 안 궁금하니?”
대뜸 꺼낸 내 질문이 꽤 이상했던지 상대방은 당황했다.
“음… 알려주고 싶은 거니? 말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근데 왜?”
왜라고 물으니 내가 더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나이를 알아도 딱히 쓸 필요가 없었다. 한국처럼 언니, 오빠, 동생, 후배 등 호칭을 정리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문화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나이 신경 쓰지 말고 젊게 살자.
마음 푹 놓고 지내다가 첫 수업시간,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누가 내 나이를 물으면 어쩌지. 동양인은 실제보다 어려 보인다는데 내가 나이가 많다는 걸 알면 친구 사귀기도 어렵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지나가는데 벌써 내 차례가 됐다. 다행히 아무도 나이를 밝히지 않아 나도 별말없이 넘어갔다. 왜 이렇게 쓸데없이 나이가 신경 쓰일까. '나이 먹고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기 힘들겠어요.' 한국에서 누군가 지나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수와 면담하며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나이가 많으면 같이 어울려 지내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된다, 솔직히 조금 겁이 난다고 했다. 교수는 껄껄 웃더니 오히려 나이를 먹는 게 좋지 않냐고 되물었다. 본인은 절대 열아홉 살로 돌아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거라고. 경험으로 쌓인 지혜와 맞바꿀 만큼 어린 나이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고 헀다. 그리고 아마 생각보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이 어리지 않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오히려 네가 어린 축에 속할 수도 있어."
그의 말이 맞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이미 다른 전공을 했고 일을 하다가 입학했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계속하고 있는 학생도 있었고 목공이나 자동차 정비를 했던 친구도 있었다. 오히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학생들은 어린 티를 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디자인은 좋은 스토리를 통해 나오기 마련인데 과제를 할 때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이유를 만들어내느라 머리를 싸맸다. 어려서 경험이 많지 않은 것이 더 힘든 면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공부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