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처럼 앞서가라>
위나라 사마의와 서로 대치할 당시 대치한 지 100여 일이 지난 건흥 12년인 234년 8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軍中)에서 사망했다. 당시 54세였다. 촉한의 군사가 물러나자 사마의가 제갈량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 등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다!”라고 했다.
_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제갈량, 6차 북벌에서 사마의와 맞서다.
제갈량은 234년에 6번째로 북벌에 나서 기산(祁山)으로 출격했다. 『삼국연의』의 묘사와는 달리 이때 처음으로 사마의와 대치하게 됐다. 사마의가 접전을 피하는 바람에 제갈량은 100여 일 가까이 대치 국면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따르면 당시 사마의는 촉한의 사자에게 제갈량의 침식(寢食)과 군무(軍務)의 번간(煩簡) 여부를 물었다. 제갈량의 사자가 이같이 대답했다.
“제갈공(諸葛公)은 일찍 일어나 늦게 자는 숙흥야매(夙興夜寐)를 합니다. 장(杖) 20대 이상의 형은 모두 친히 검열합니다. 먹는 밥의 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이같이 말했다.
“제갈량이 조만간 죽을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삼국연의』에는 당시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모욕을 주어 싸움에 응하게 할 요량으로 부녀용 두건과 꾸미개인 건괵(巾幗)과 부인들이 입는 흰옷을 함에 넣어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소설적 허구이다. 『한진춘추(漢晉春秋)』는 이때 제갈량이 누차 도전을 했고, 사마의가 마침내 싸움에 응하고자 하는 표문을 위명제 조예에게 올렸다는 일화를 실어 놓고 있다. 이는 정황에 비춰 대략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사마의의 표문을 접한 조예가 위위(衛尉) 신비(辛毗)에게 명령을 내려 부절(符節)을 갖고 가 사마의의 교전을 제지케 했다. 사마의가 곧 군중에 하령해 조명에 의한 교전 불가의 입장을 전했다. 첩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촉한의 장수 강유(姜維)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신비가 부절을 가지고 왔으니 사마의가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제갈량이 이같이 말했다.
“사마의는 원래 싸울 생각이 없었소. 그가 교전을 청하는 표문을 올린 것은 장병들에게 용무(用武)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오. 장수는 본래 전장에 있으면 군명(君命)을 받지 않는 법이오. 만일 능히 나를 제복(制服)할 수 있다면 어찌 사자를 시켜 1천 리나 먼 길을 달려가 교전을 청하는 표문을 올리도록 하겠소.”
제갈량은 천하의 기재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비상식적인 건괵(巾幗) 송달의 일화와 달리 『한진춘추』의 이 일화는 당시의 정황에 비춰 대략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촉한의 군사가 물러나자 사마의가 제갈량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 등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다!”라고 말한 대목이다.
당대 최고의 병법가인 사마의가 이런 칭송을 한 것은 제갈량의 용무(用武)가 간단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삼국연의』는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이 동남풍을 부르는 교차동풍(巧借東風)과 위나라 군사의 화살을 대거 거둬가는 초선차전(草船借箭) 등의 기책을 구사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이는 소설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정사 『삼국지』에 소개된 제갈량의 용무 사례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고 제갈량이 구사한 기이한 계책에 관한 일화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건안 16년인 211년에 행해진 익주(益州) 탈취 작전을 들 수 있다.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은 자가 계옥(季玉)으로 명석한 판단력이 부족하고 귀가 얇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었다. 자신을 옹립했던 조위(趙韙) 등과 틈이 벌어진 모반 사건이 빚어진 게 대표적이다. 파군(巴郡) 태수 방희(龐羲)는 한중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장로(張魯)가 군사를 일으켜 익주를 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유장에게 보고했다. 유장이 문무관원과 대책을 논의하자 익주별가 장송(張松)이 유비를 끌어들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유장이 이를 받아들여 법정(法正)을 사자로 보냈다. 유비가 법정을 만난 뒤 곧바로 제갈량을 불러 파촉으로 진군할 일을 의논하자 제갈량이 이같이 말했다.
“형주는 중요한 곳이니 군사를 남겨두고 지켜야 합니다.”
유비가 이를 좇아 제갈량과 관우 등에게 명해 형주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황충 및 방통과 함께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유장이 유비를 크게 영접했다. 이때 장로가 병마를 정돈해 가맹관(葭萌關)을 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유장이 곧바로 유비에게 병력을 증원해주며 이를 막게 했다. 유비는 가맹관까지 군사를 이끌고 가서는 즉각 장로를 치지 않고 널리 은덕을 베풀며 민심을 수습하는데 진력했다. 마침 손권이 조조의 공격을 받고 급히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자 유비가 곧 방통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방통이 건의했다.
“은밀히 정병을 선발해 밤낮으로 달려가 곧바로 성도를 습격해야 합니다. 유장이 군사를 모르는 데다 평소 방비를 소홀히 했을 터이니 대군이 갑자기 나타나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책입니다. 양회(楊懷)와 고패(高沛)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자 강병을 거느리고 관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유장에게 장군을 형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간했습니다. 장군이 사람을 보내 형주에 긴급한 사정이 있어 구원하려 한다며 돌아가는 모습을 취하면 두 사람 모두 장군의 회군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반드시 경기(輕騎)로 장군을 배송할 터이니 이때 그들을 사로잡은 뒤 진군하여 그들의 부대를 취하고 곧 성도로 향하는 것이 중책입니다. 마지막으로 백제성(白帝城)으로 물러나 형주와 연계해 서서히 익주를 도모하는 계책이 있는데 이는 하책입니다. 만일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커다란 곤경에 빠지는 일이 곧 닥칠 것입니다.”
유비가 중책을 취했다. 양회와 고패를 제거한 뒤 성도로 향하자 유장의 군사들이 다투어 항복했다. 이때 문득 가맹관을 지키던 장수 곽준으로부터 유장이 병사를 보내 가맹관을 포위했다는 급보가 올라왔다. 형주와 연락이 끊길 것을 우려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속히 장비와 조운을 이끌고 성도로 들어오게 했다. 제갈량이 유비의 서신을 받아보고는 급히 군사들을 소집시켰다. 관우에게 형주를 지키도록 조치한 뒤 장비 및 조운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성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군태수 엄안이 지키고 있는 파동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곧 장비에게 정병 1만 명을 주어 큰길을 따라 파주와 낙성의 서쪽으로 가도록 하고, 조운에게는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로 직행하게 했다. 자신은 간옹과 장완을 이끌고 조운의 뒤를 따랐다.
맹장 엄안을 의리로 풀어주다.
이는 장비와 조운의 기질과 장점을 훤히 꿰고 최상의 효과를 내려는 조치였다. 『삼국연의』는 제63회의 ‘의석엄안(義釋嚴顔)’ 대목에서 장비가 성도로 진군하는 도중 유장의 맹장 엄안을 의리로써 풀어주는 장면을 세밀히 묘사해 놓았다. 주목할 것은 나관중이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의석엄안’은 제갈량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은 점이다. 『삼국연의』 전체를 통틀어 장비가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대목이 바로 이 장면이다.
설령 나관중이 제갈량을 미화할 요량으로 ‘의석엄안’ 대목을 과장되게 표현한 게 있을지라도 이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비와 조운을 이끌고 성도로 들어가는 전 과정을 지휘한 사람은 제갈량이다. 이 과정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풀린 것은 ‘의석엄안’의 계책을 낸 제갈량의 공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유비도 익주를 취한 뒤 이를 인정해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사마의가 제갈량의 영루 등을 둘러보고 ‘천하의 기재이다!’라고 평한 게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르게 보는 힘』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1km의 질주보다 1도의 방향전환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