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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내 인생 첫 번째 트레킹

<여행의 이유>

by 더굿북

피엘라벤 클래식은 스웨덴 북부 라플란드 지역 중 쿵스레덴 110킬로미터를 걷는 트레킹 대회다. 이 트레킹 코스는 ‘왕의 트레일’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코스다. 전 세계 2,000명의 참가자는 스웨덴의 가장 높은 산인 케브네카이세의 멋진 경관을 조망하며 니칼루옥타 마을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아비스코까지 걷게 된다. 걷는 동안 모두 8개의 스탬프를 받아, 각 지점을 통과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자기 잠자리인 침낭과 텐트, 먹거리, 쓰레기는 모두 메고 다녀야 한다.


라플란드는 백야다. 곧 어두워질 기세지만 결코 어두워지지 않는 밝은 회색빛 밤과 쨍하게 환한 하얀 낮이 번갈아 존재했다. 덕분에 산속에서 어둠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탁 트인 시야 안에 먼 산이 첩첩이 들어왔다. 산은 웅장했고 마법사가 툭 튀어나올 것같이 영험한 기운을 뿜어냈다. 옆을 내려다보면 초원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촘촘히 피어 있었다. 작은 꽃잎은 보드랍고 맑은 흰색이었다. 노랗고 키가 큰 꽃은 달맞이꽃을 닮았다.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했다. 꽃들이 다칠세라 스틱을 조심스레 디뎠다.

스산한 구름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8월이지만 스웨덴 북부 산속에서는 얇은 오리털 파카 위에 두꺼운 등산 점퍼까지 챙겨 입고도 으슬으슬했다. 웬만한 용기로 밖에서 씻는 것은 불가능했다.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 중 유독 하얀 피부의 서양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훌러덩 다 벗고 계곡에서 씻기 시작했다.

이곳 쿵스레덴에서 필요한 물은 모두 계곡에서 해결한다. 수돗가는 없다. 하지만 사우나는 있다. 총 8개의 포인트 중 살까(Salka), 알레스야 우레(Alesjaure), 키에 이른(Kieron) 세 곳에 있다. 사우나는 계곡 옆 작은 나무집이다. 사우나에서 몸이 더워지면 밖으로 나와 계곡물에서 몸을 식히고 다시 들어간다. 사우나 들어가기 전, 문 앞에 있는 양동이에 계곡물을 담아 들어간다. 사우나실을 덥히는 난로처럼 생긴 화덕 위에 물탱크가 있다. 그 물탱크에 내가 쓸 만큼의 물을 부어둔다. 사우나를 하는 동안 물이 데워지면 사우나 옆 샤워실로 간다. 샤워실엔 사우나실 물탱크와 연결된 수도꼭지가 있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로 샤워하고 나오면 된다.

남녀 혼탕이 처음인 나는 매번 사우나 문 앞에서 서성이다 돌아섰다. 트레킹 4일째 되던 날 밤, 혼탕 입성에 성공했다. 어떻게? 그냥 옷 입고 들어가면 된다. 다들 옷 입고 들어온다. 물론 다 벗고 들어오는 분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남자는 반바지를 걸쳤고, 몇 명의 여자는 비키니를 입고 들어왔다. 사우나를 나와 계곡에 몸을 식히러 가는 분 중 상당수는 알몸으로 나와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았다. 확연히 우리와는 좀 다른 문화라는 것이 느껴졌다.


헤이! 헤이헤이!

스웨덴어로 헤이(Hej)는 ‘안녕’이다. 길을 걷다 만나는 트레커들은 서로 인사를 건넨다. 이 아름다운 길 위를 2,000명의 전 세계 참가자들이 걷는다. 작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최연소 참가자는 2살배기 스웨덴 아기였다. 아기의 짐까지 채운 엄마 아빠의 배낭 무게는 각각 20킬로그램이 훨씬 넘었다. 아기는 트레킹 내내 업혀 다녔다. 하지만 결승점 바로 앞에서는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서 들어갔다. 사람만 걷는 건 아니었다. 애완견과 함께 온 트레커가 많았다. 그리고 애완견도 자기 먹을 것은 자기 배낭에 넣어 메고 다녔다. 애완견들이 배낭을 멘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1.jpg?type=w1200 ⓒ정시영 스웨덴 라플란드


라플란드에는 1만여 년 전부터 순록을 치며 사는 소수 원주민 부족 사미족이 살고 있다. 알레스야우레를 지날 때 멀찍이 사미족 마을이 보인다. 길에서 사미족을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트레킹 첫날 순록 버거를 만들어 팔던 젊은 청년이 사미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운이 좋은 날에는 사미족이 방목하는 순록을 멀리서 구경할 수 있다.

트레킹 코스는 참 다양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 위의 나무 트랙을 걸었다. 발등까지 차오르는 늪지대를 지났다. 얕은 계곡은 다리 없이 걸어서 건너가야 했다. 큰 감자보다 굵은 돌이 촘촘하게 박혀 중심을 잡을 수도 없는 길이 있었다. 일명 ‘너덜길’에서는 더는 걸을 수 없어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르막길은 많이 없었다는 것이다.

퍽 소리와 함께 14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스틱은 부러졌고, 카메라 줌렌즈는 휘었다. 나무 트랙 밑으로 한쪽 손이 빠졌다. 나무트랙 밑은 늪지대라 손은 늪 밑으로 쑥 꺼졌다. 남아 있는 한 손에 든 카메라를 옆으로 치우고 디뎌보았다. 내가 일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등 뒤 배낭은 나를 더 꾸욱 눌렀다. 배낭은 앞으로 쏠려 내 목도 슬쩍 눌렀다.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소리가 질러지지도 않았다. 버둥거리길 몇 차례 그냥 넋을 놓아버렸다. 마침 지나가던 동료들이 내 배낭을 잡고 끌어올렸다. 팔을 버둥거리며 딸려 올라갔다. 넋이 나가니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훅 빠져버린 정신을 찾아오는 수밖엔 방법이 없었다. 얼굴과 팔다리의 가벼운 타박상을 툭툭 털어냈다.

%BC%B6%B3%D7%C0%CF%C3%D6%C1%BE.jpg?type=w1200 ⓒ정시영 스웨덴 라플란드


길을 한참 잘못 들었다. 우리가 건너야 할 다리는 너무 멀었다. 계곡을 가로질러야 했다. 계곡의 깊이는 무릎 정도였다. 하지만 물살이 세 보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며 아침도 안 먹고 걸었더니 배가 고파왔다. 배낭 옆 망주머니에 있던 초코바를 꺼냈다. 초코바를 보고 더 멍해졌다. 초코바 가운데 쥐의 선명한 이빨 자국과 함께 반달 모양의 구멍이 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 문을 열었을 때 후다닥 도망가던 쥐 생각이 났다.

‘나쁜 쥐새끼… 이건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비상식량인데…….’

망연한 마음으로 초코바와 계곡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남자 동료가 신발을 벗고 등산복을 걷었다. 물속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외쳤다. “제가 업고 건널게요!” 나를 비롯해 4명을 그가 들쳐 업었다. 4명의 배낭도 옮겨주었다. 거센 물살에 그의 슬리퍼는 떠내려갔다. 돌 때문에 발이 아프고, 물이 너무 차 발이 얼어버릴 거 같은 고통을 참아가며 희생한 것이었다. 모두 계곡 앞에서 마주한 짜증과 막막함을 딛고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희생해준 동료에 대한 고마움, 힘들어도 티 내지 않고 버텨준 것에 대한 대견함, 우리는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뿌듯했다.

“무지개다!” 거짓말처럼 선명한 일곱 가지 색을 드러내는 커다란 무지개가 나타났다. 완벽한 반원을 그리는 무지개는 내 눈앞에서 시작했다. 즉 무지개의 끝이 바로 앞에 있었다. 동화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무지개의 끝에는 보물이 있다고. 우리는 우리 안의 동료애라는 보물을 무지개 끝에서 보았다. 그리고 무지개의 희망을 보았다. 그 뒤 우리는 절대로 화내거나 짜증 내는 일 없이 서로 끌고 당기고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만약 길을 제대로 걸어 다리를 건너버렸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무지개는 결코 볼 수 없었을 거라고. 그리고 다리 앞에서 무지개를 보았다면 무지개의 끝도 볼 수 없었을 거라고.

3.jpg?type=w1200 ⓒ정시영 스웨덴 라플란드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내 발등만 보며 걷고 있었다. 발목이 등산화에 쓸린 다리는 감각이 없어 힘들었다.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다. 그럴 때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다. “뒤를 좀 돌아봐! 비싼 비행기 표 사서 여기까지 왔는데 땅만 보고 걸을 거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를 돌았다. 나의 뒤에는 내가 고개를 숙이고 발등만 쳐다보며 걸어온 길이 끝없이 그리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장대하고 고래 등 같은 산들이 켜켜이 제자리를 지키고 그 사이를 굽이굽이 빙하수가 흘렀다. 옆으로 야생화가 산들거렸다.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내가 돌아보지 않던 길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나는 왜 옆을 보지 못하고 힘든 것만 음미하며 걸어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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