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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1. 2016

02. 첫 데이트

<112일 간의 엄마>

첫 데이트 신청을 한때가 언제였더라. 아직 메인 캐스터가 되기 전이었지 싶다.


“늘 여러모로 도움받고 있어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은데. 식사라도 같이 하면 어떨까?”
“네, 고맙습니다.”

나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오케이 해주었다.

평소의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마련한 식사 자리였는데 그 자리의 그 공기가 기분 좋았다. 오코노미야키를 먹으며 “네”, “그렇죠” 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나오. 결코 대화가 활기를 띤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어딘가 호흡이 잘 맞았다. 첫 데이트인데도.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어느 날인가 대화를 이어가던 중에 나오에게 말했다.

“우리 사귈까?”
“네.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

이때도 역시 나오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귀기 시작하고 나서도 나오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나는 딱히 숨길 생각이 없었는데 나오는 부모님과 회사 동료에게조차 비밀로 했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둘 사이를 알았던 사람은 나와 가깝게 지내던 탤런트며 회사 관계자까지 열 명 정도였지 싶다.

나야 무슨 소리를 듣던 상관없었지만 나오는 달랐을 것이다. “진행자인 시미즈 켄이 여자 스태프에게 작업을 걸었다”라는 말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코 손가락질 받을 사이가 아니어도 소문이란 때때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나란 존재 때문에 피해가 가선 안 돼. 상대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아. 나오는 그렇게 마음 써주었던 것 같다.

‘걸림돌이 돼선 안 돼.’ 분명 그것이 나오의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나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우리 사귀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오는 어디에 데려가 달라, 이걸 하고 싶네, 저걸 갖고 싶네, 라는 말을 꺼낸 적도 없다. “안 해!”, “난 싫어!” 하는 식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운 적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나오는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나오에게 스타일리스트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뒷받침으로 인해 연기자든 모델이든 한층 빛나는 것이 목표였다. 자기 자신이 돋보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뒤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뒤에서, 오로지 뒷받침에 매진한다. 그것이 나오가 일하는 방식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그 사람이 빛나는 모습을 보는 것, 나오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우리 사귀는 거, 딱히 숨기지 않아도 돼.”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 누차 그런 말을 했지만, 변함없이 나오는 “응”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오는 역시 나오임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무대 뒤의 조력자로서 나를 받쳐주었다.

단둘이 있을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떠올려보아도 사실 그다지 많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자칫 수다스러운 사람으로 비치기 쉬운데 사실 나는 평소 말수가 적다. 물론 대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여자들로부터 “왜 아무 말도 안 해주는데?”, “뭘 생각하는지, 말을 해봐” 하고 채근당한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2011년 가을 무렵,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둘이 여행을 갔다. 행선지는 아마미오 섬. 딱히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지만 나오가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되도록 따뜻한 곳으로 갈까?” 하여 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뭘 했느냐면, 둘이 해변에 앉아 어깨를 맞댄 채 아마미오 바다를 멍하니 바라봤다.

“바람이 기분 좋네.”
“응.”
“바다가 예쁘다.”
“응.”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그저 둘이 함께 앉아 있었다.

둘이 자주 간 한국 여행 때도, 내 고향에 있는 곤고산에서 데이트를 즐겼을 때도 그랬다. 별다른 대화가 없어도 나는 즐거웠고 왠지 기분이 좋았기에 점차 그 시간들이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둘만의 시간을 나오와 마음으로 맛보았다. 곁을 돌아보면 나오가 있고, 눈이 마주치면 웃는 낯으로 바라봐주었다. 그저 함께 같은 경치를 보고, 같은 것을 맛보고, 같은 시간을 보냈다.


생일의 프러포즈

사귄 지 2년. 캐스터로서 아직 한 사람 몫을 못하는 내가 결혼을 해도 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또한 나오에게 이런 나라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괜히 결혼해서 나오만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건 아닌지. 그런 한편, 나오를 2년씩이나 어정쩡하게 놔두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오의 성격으로 볼 때 결혼하지 않는 이상 우리 둘 사이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싶었다.

결심했어. 결혼하자.

일단 결정하고 나면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오 대학에 진학한 것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의 마음에 ‘순간’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런 직업은 아나운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난 주오 대학에 문학부 사회학과 매스컴 미디어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아나운서를 목표로 공부하려면 바로 여기다’ 하고서 덜컥 응시했다.

취직할 때도 그랬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체육회 ‘아메리칸 풋볼부’는 당시 취업하기에 유리한 면이 많았지 싶다. 매스컴 쪽이 아니었다면 그 분야와 관련된 길로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나운서가 되겠어!’라고 마음먹은 나는 도전했다.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길이 됐든. 뭐, 이런 말을 하면 대단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나는 단지 흔들린다는 것이 두렵고, 사소한 일로 금세 고민에 빠져 끙끙대고,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소심한 사람일 뿐이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나오와 함께 모델하우스를 돌아보고, 나오의 의견도 물어 지금 살고 있는 맨션을 구입했다. 그때가 연말이 가까운 11월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13년 3월 10일. 나오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 사실 그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신혼집을 장만했을 때 청혼했어도 좋았다. 하지만 멋있는 척하면서도 부끄러움 많은 내가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진즉에 정해놓고도 좀처럼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나오의 생일은 다시없을 좋은 기회였다.

나는 단골 레스토랑을 예약해놓고 나오와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물어도 나오는 필요 없다는 대답만 했다.

나오는 스타일리스트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하튼 패션을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노트나 수첩에 드레스 디자인 같은 것을 스케치하곤 했다. 옷이며 가방, 구두, 모자 같은 건 옷장에 다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값비싼 물건은 거의 없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뭔가 한 가지로 포인트를 주고 저렴한 것들로 요리조리 코디해서 패션을 즐기는 것 같았다.

“뭔가 갖고 싶은 거 없어? 뭐가 좋을지 말해봐.”

그렇게 몇 번을 말해도 “필요 없어요”라는 한마디뿐. 결국 레스토랑에 부탁해둔 서프라이즈 생일 케이크로 축하하고, 집으로 돌아와 하나 더, 준비해둔 진짜 선물을 했다.

“이거.”

나는 접어놓은 혼인 신고서를 봉투에서 꺼내 나오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나오는 살짝 망설이면서도 역시 웃는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 표정 너머로 ‘정말 나로서 괜찮을까’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나오다웠다.

“왜 그래. 나오밖에 없다니까.”

나는 얼른 서명하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며칠 안 돼 나오와 함께 스미요시 다이샤(住吉大社)신사를 찾아가 물어보니 “5월 19일이 비어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식장을 잡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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