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최후의 만찬>은 현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다. 반델로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하고 매년 2천 두카트를 받았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와 함께 이탈리아 미술 전반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최후의 만찬>, 1495~7, 벽기둥에 유채와 템페라, 460×880cm,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 _(왼쪽에서부터) 바르톨로메오, 야고보(작은), 안드레, 가롯 유다, 베드로, 요한, 예수, 도마, 야고보(큰), 빌립보, 마태, 유다, 시몬이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수도원 식당에 이런 주제의 그림을 장식하는 것은 당시 일반적인 전통이었다. 식당은 일시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만나는 곳으로 예수가 “내가 너희와 늘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이며 수도승들은 식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괴테는 레오나르도가 “접는 방식대로 접혀진 테이블 커버, 양쪽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모양, 빛의 줄무늬”도 그대로 재현했으며 수도승들이 사용하는 접시와 유리잔까지도 똑같이 재현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 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으며 배경을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구성 중 하나인 현혹적인 건축물로 구성하여 관람자가 깊은 인상을 받도록 했다. 이 그림의 배경을 위해 드로잉한 종이에는 팔각형 속에 원이 들어 있다. 원은 식당 바닥과 지붕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 그림의 비밀스러운 기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즉 원의 중심은 그림의 소실점으로 예수의 얼굴을 그 위에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수학적이며 완벽한 기하적 대칭의 구성을 선택했다. 중심 인물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보조 수단으로 삼았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그리스도가 뒷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앉은 것조차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두 개의 수평선이라는 틀을 깨뜨린다. 자연스러운 식탁의 선은 유지하더라도 위쪽은 전체 그룹의 윤곽을 위해 트여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효과를 계산하는 아주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방의 전체적 조망, 벽의 모습과 장식들이 인물의 효과에 도움을 줘야 하며 모든 것들은 신체를 더욱 크고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 한다는 방식이다. 그래서 방은 깊어지고, 벽은 여러 개의 벽걸이 장식으로 분할된다. 이런 중첩은 입체의 환각을 돕고, 수직선이 되풀이되면서 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퍼져나오는 방향에 악센트를 준다. 그것들은 작은 평면과 선이므로 인물상에 진지하게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뵐플린은 레오나르도가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 하나만을 유지한 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했으며 예수의 몸짓과 모습에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있다면서 이는 15세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이라고 말했다.
(위)<최후의 만찬>의 부분, 예수와 도마 / (아래)<최후의 만찬>의 부분,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과 가롯 유다 사이에 베드로의 모습이 보인다. 예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요한은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침묵의 시’라고 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모델들의 몸짓,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으로 하여 침묵 속에 전하려고 했으며 그의 의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모델들의 행동을 연출에 의한 것처럼 표현하여 각각의 개성이 나타나도록 구성했다.
이제 막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손가락을 쭉 편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지칭된 사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워서 귀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다. 손가락을 펴서 옆사람 얼굴 아래에 댄 사람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레오나르도는 모델들의 귀와 입을 중시하며, 손을 화자의 반응과 언어에 대한 설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우리는 그림에서 놀라움·회의심·두려움·성냄·부인·혐의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대체 누가 선생님을 팔아넘길 수 있겠느냐”며 놀라워하고, 빌립보는 일어서서 발생할 일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바르톨로메오도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으며 놀라거나 더러는 화를 내며 자신들의 무죄와 신실함을 주장한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차분한 모습이며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예수와 유사한 의상을 입은 제자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는 듯하다. 왼쪽 끝의 바르톨로메오는 이제 막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요한 옆에 얼굴이 검은 유다가 앉아 있고 그의 손은 그릇에 거의 닿을 듯하다. 시뇨렐리,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기를란다요 등 콰트로첸토 화가들은 부패한 인간상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묘사할 때 테이블 반대편, 즉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의 규칙을 무시하고 모든 제자들을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나란히 함께 앉게 했다.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가 처음이었으며 후대 화가들은 더 이상 유다를 예수 반대편에 따로 그리지 않게 되었다.
과거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통일성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대화하기 때문에 유다의 배신을 시사하는 장면인지 단순히 만찬의 장면인지 불분명하다. 예수가 말씀을 마친 후의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것은 15세기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인데, 이런 모티프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바로 레오나르도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1495년경에 그리기 시작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게으름을 피웠다고 한다. 평소처럼 작업실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 가서 직접 그리는 일이라서 사람들이 볼 때는 그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완성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요하게 한 것 같다. 반델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아침 일찍 식당에 가서는 발판에 올라가 작업을 시작하였고 어떤 때는 먹고 마시는 것을 잊고 해가 질 때까지 붓질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나 이리저리 바라보기만 하고 며칠 동안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에는 코르테 베키아에서 흙으로 말을 빚다가 정오에 무슨 생각이 났는지 수도원으로 달려가서는 발판에 올라가 붓질을 한두 번 하고 돌아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이 시기에 무엇 때문에 그리 바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고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는 데는 2~3년이나 걸렸다. 루도비코의 서기이자 시인인 발다사레 타코네에 의하면 당시 레오나르도는 ‘다나에’를 위한 무대장치를 했고 루도비코의 애인 세실리아에 의해 1498년에 완공된 궁전과 스포르제스코 성의 외관을 장식했다. 또한 이름을 알 수 없는 후원자의 집을 디자인했고 공작부인 비트리스의 별장과 성내에 있는 아파트와 방 몇 개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다양한 건물들의 주변과 내부를 드로잉했는데, 이는 그가 밀라노의 공공건축가로 활약한 것이 아닌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때 그는 5년째 여섯 명의 조수를 데리고 있었고 이들의 생활을 책임졌기 때문에 벌이가 신통치 않아 염려하기도 했다. 그는 피아센자 대성당의 청동문을 제작했으며, 브레스치아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제단화를 그렸고, 팔기 위한 디자인들을 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얼굴을 그릴 때 밀라노 거리의 행인들을 관찰하여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의 추기경 측근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했고 손은 파르마의 알레산드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사리와 지랄디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열한 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는 그리지 않았다. 일 년이 넘도록 작품이 완성되지 않자 수도원 측의 불평이 이어졌다. 이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전하, 작품에서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이기에 그의 사악함에 걸맞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찾느라 거의 일 년 동안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가 생각하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악한의 얼굴을 찾기만 하면 바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께 저를 모함한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할 터인즉 그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발견했고 작품을 완성시켰지만 <최후의 만찬>은 혹평을 받았다. 바사리 시대의 사람들은 “현혹스러운 착색”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냉대했으며, 1624년 카르투지오 수도회(1086년 성 브루노가 프랑스 샤르트리우스에 개설) 수사 사네스는 “볼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 시기 수도원의 벽을 자르고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면서 예수의 다리와 테이블 커버 일부가 잘렸다. 괴테에 의하면 1500년과 1800년 두 차례의 홍수로 그림이 심히 파손된 것으로 전해진다.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인들은 사용하지 않던 식당을 마초를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공화국 기병들은 제자들의 얼굴에 벽돌을 던지면서 재미있어했다. 2차 세계대전 말에는 폭탄이 식당 지붕에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모래주머니들로 가려져 있어서 파손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