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베리
대학에서 정치학 수업만 60학점을 수강한 찐 '문돌이'이지만 옛날부터 과학, 그 중에서도 물리학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애착이라고 해봤자 물리를 체계적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초, 중학교 때 엄마가 사다 준 시뻘건 색깔의 '뉴턴' 잡지를 겉핥기 식으로나마 독파하던 추억을 되새기며 내가 가지 않은 길-물리학자-을 망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가끔 '인터스텔라' 같은 최신 물리학 기반 SF영화라도 개봉할라 셈치면 물리학에 대한 동경은 여지없이 출렁이곤 한다.
'카를로 로베리' 라는 물리학자를 알게 된 것은 작년 연말이었다. 연말연시 누구나의 통과의례인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증후군' 에 시달리며 인터넷 교보문고를 뒤지던 나는 <화이트홀> 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얇은 책을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골랐고 이 책은 하와이로의 9박 10일 동안의 신혼 여행 캐리어에 순장된 단 하나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문명과 단절된 비행기에서의 10시간을 양질의 수면으로 채워넣기 위해서는 가능한 난해한 책을 읽는 것이 상책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저번 인도네시아 여행에 데려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히 신의 한수였다). 그런데 아뿔싸, 하와이안 항공은 일론 머스크의 은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STARLINK 와이파이를 제공하고 있었고 <화이트홀>은 결국 기내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대신 나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화이트홀>을 읽었고 신혼여행의 와이키키 해변이라는 완벽한 TPO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아 카를로 로베리의 책을 몇 권 더 읽어 보기로 마음먹고 귀국하자마자 그의 책을 두 권 더 구매했다. 2025 신년 첫 번째 도서 구매였던 것이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라는 반골 기질을 자극하는 제목. 좋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물리학의 큰 흐름을 짚어가면서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탐구하는 물리학의 전체 체계를 개괄하여 주는 것을 목표로 한 책이다.
그러나 솔직히, '일반적으로' 추천할 만한 책이 아니다. 너무 어렵다.
이 책을 모두 소화하기 위하여서는 최소한 대학 수준의 물리학 이해도나 물리학 교양서를 적어도 3권 정도는 읽어본 소양이 필요한 듯 하다. (나는 서두에 언급했던 물리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빛의 파장성과 입자성,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 등에 관한 놀라울 정도로 지엽적이고 귀여운 배경지식이 있으므로 알레르기 반응 없이 읽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책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전부 이해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내 잘못이 아니라 작가의 잘못이기 때문에 과감히 넘기면 그만.
이 책의 내용 중 내게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었던 개념을 하나 소개해 봐야겠다. 이 개념은 꽤나 충격적이어서 하필 그 내용을 읽은 당일 만난 대학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꺼냈다가 소주병으로 한 대 맞기까지 한 기억이 버무려져 아주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지구가 구 모양으로 둥글게 생겼으므로, 남쪽 또는 북쪽 어느 방향이든 일직선으로 나아가면 결국 한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고 상상하였을 때, 북극에서 로켓을 쏘아올렸을 때 결국 남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라는 것이다.
...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솔직히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소식이다. (사실 내가 정확히 이해했는지 여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쓸모없음에 가슴이 뛴다. 살아 있음의 경이를, 의미를 찾는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여전히 밝히고 탐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 광대한 세계입니다. 제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꿈은 이 책을 읽는 젊은 독자 중의 누군가가 항해를 떠나 빛을 밝히고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저 언덕 너머에 아직 탐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더 큰 세계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