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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독쌤 Oct 25. 2018

읽는 자가 배운 자를 이긴다

지식도서 독서가의 힘

16화 <책이 열등생을 구원하는 방법>https://brunch.co.kr/@bookguru/32에 이어서


“선생님, 이 책 재미없어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이들에게 지식도서를 읽으라고 주면 돌아오는 반응입니다. 사교육의 메카 대치동이든, 한적한 시골 동네든 상관없습니다. 재미까지는 아니어도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고 대답하는 아이가 10명 중의 한 명 될까말까 합니다. 그나마 어느 정도라도 내용을 파악하면서 읽어내는 아이는 그보다 훨씬 적습니다. 전교 1,2등을 다투는 아이들이 모인 과학고 준비반에서조차 지식도서 한 권 제대로 읽어내는 아이를 찾기 힘든 것이 우리나라의 독서교육, 언어능력의 아픈 현실이죠. 

성인용 지식도서를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청소년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제대로 읽은 지식도서 한 권의 위력은 엄청납니다. 제가 중학생 아이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죠.

“10번을 읽든, 100번을 읽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같은 책 딱 한 권만 완벽하게 읽어봐. 그러면 무조건 명문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

이렇게 단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대로 읽은 지식도서 한 권이 학습능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제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 지식도서를 읽는 힘, 호기심

지난 연재에서 말씀드렸듯, 저는 초등 고학년 시절 읽었던 300권짜리 소년소녀 명작 전집 덕분에 세상없는 바보에서 중학교 교과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상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습니다. 성적이 상위권으로 올라서긴 했습니다만, 독서가의 레벨로 보자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초보적인 수준, 자기 또래의 이야기책을 잘 읽고 이해하는 정도 수준에 불과했죠.(바꿔말하면 자기 또래 이야기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능력만 갖춰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 또래의 이야기책만 제대로 읽어도 또래 대비 우수한 공부머리를 갖출 수 있습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독서의 지평을 정말 '우연히' 넓히게  됐습니다. 저를 입시 경쟁 교육 바깥으로 날려버린 그 사건, 중학교 2학년 때 걸린 결핵성 뇌수막염이 바로 그 계기였죠. 

사실 첫 입원 5개월 동안 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밥먹듯이 40도를 넘나드는 고열과 두통 때문에 밤낮 구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상태에서 하루 30대가 넘는 항생제 주사를 맞았고, 세 번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독한 항생제에 핏줄이 죄다 터져 양팔과 손등, 발등까지 새카맣게 피멍이 들었죠. 그와중에 몇몇 죽음을 보았습니다. 어제까지 옆 병상에 누워있었던 아저씨가 어느 날 갑자기 복막염 파열로 세상을 등지고, 병동 복도를 오갈 때 종종 마주쳤던 뇌성마비 여자아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놓았습니다. 막상 그때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병원 생활과 통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제가 그 죽음들을 다시 떠올린 것은 퇴원을 해서 학교로 돌아가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금간 유리잔 취급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에서 열외였습니다. 체육이나 교련 수업에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원하면 언제든 조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학교에 얼굴만 내밀고 병원에 가는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병원 건물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같은 병실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난생처음 강렬한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병원 치료를 받는 동안 목도했던 몇몇 죽음이 저에게 지울 수 없는 의문을 던져주었습니다.


‘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어야만 할까?’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을 뭘까?’

‘세상은 왜 이런 모습일까?’


어지간한 것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호기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였지만 그렇게 떠오른 의문만큼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몇몇 어른들에게 물어봤지만 별 싱거운 녀석 다 보겠다는 반응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중학교 3학년, 제가 처음으로 서점의 문턱을 넘은 이유였습니다.


서가를 둘러보던 저는 폴 데이비스의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천체물리학 책을 골라 계산대로 갔습니다. 그리고 제 용돈을 그 두 권의 책을 사는데 다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과 머리말이 ‘네 궁금증을 풀어주마’라고 외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펼쳐서 읽어보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 언어능력에 비해 그 두 권의 책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던 겁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입시 경쟁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 쓸 데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공부는 완전히 내팽개친 채 책만 둘러파는 짓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무려 2년 동안 말입니다. 



2. 지식도서로 기른 언어능력의 힘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2년 동안 천체물리학 책을 탐독하며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또 한 번 수술을 했고, 짧은 입원 후 통원 치료를 이어갔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 공부는 완전히 내팽개친 상태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정도가 심했던 것이 중간, 기말 고사 기간을 ‘책 읽기 딱 좋은 기간’으로 삼았으니까요. 시험을 치고 12시쯤 하교하면 책을 사서 독서실로 가서 밤새 책을 읽고,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치른 후 다시 책을 사서 독서실로 가는 식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좋아하는 소설책 한 권을 통째로 배껴적는 이상한 취미생활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성적은 급전직하. 내신이 무려 9등급이었죠. 


그러던 제가 대학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한참 늦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무렵이었습니다. 막상 졸업 학년이 되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고, 수능 모의고사와 전국 논술 모의고사의 성적이 희한하게도 높게 나와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논술 모의고사는 전국 20등 안에 들어 저조차 어리둥절할 정도였죠.


저는 여름방학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치 공부를 4개월만에 따라잡아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이었습니다. 밤낮없이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아주 빠른 속도로 고등학교 공부를 따라잡았습니다만 무리한 계획인 건 틀림없었습니다. 수능 시험 날 아침까지도 미처 다하지 못한 공부를 해야 할 정도였죠. 어찌나 무리를 했던지 1교시 국어영역(당시에는 언어영역) 문제를 풀다가 코피를 쏟는 바람에 당황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내신이 9등급이었던 저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상위 4% 안에 들었습니다. 본고사와 논술고사도 무사히 통과해 서울 안에 있는 두 개 대학에 합격했고, 제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여름방학을 앞둔 무렵이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지능이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억력도 형편없고, 다소 덜렁거리는 성격이기도 합니다. 그런 제가 4개월 동안 고등 교과 3년치의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코스모스>는 우주 역사 137억 년을 다룬 700페이지 분량의 천체물리학책입니다. 이 책은 초등 1학년부터 고등 3학년까지 전과목 교과서를 합친 것보다 많은 정보량과 고3 교과서를 훌쩍 뛰어넘는 난이도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10번 가까이 읽었습니다. <코스모스>에 비하면 고등학교 교과서는 굉장히 쉬운 책이었고, 습득해야 할 지식의 양도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저는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 공부를 한 기간이 고작해야 중등 1학년 때 1년, 고등 3학년 때 6개월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제 사례를 소개한 이유는 지식도서 한 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단적으로 보여드릴 수 있는 예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 동안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와 <코스모스> 외에 에리히 프롬의 철학책 몇 권을 더 읽었습니다. 읽은 지식도서를 다 합해도 10권을 넘지 않죠. 이 10권 남짓한 책 중에 저의 지식 처리 능력의 9할은 <코스모스> 한 권을 통해 길러졌다고 생각합니다. <코스모스>를 열 번 가량 거듭해 읽는 과정에서 저는 이 책이 가진 지식의 구조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는 곧 저의 뇌가 신경가소성을 발휘해 <코스모스> 정도의 지식 체계를 습득할 수 있는 상태’로 업그레이드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적인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학교 석좌교수는 중학교 3학년 때 <코스모스>를 여러 번 정독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이런 독서의 경험이 세계적인 학자로서의 기본 능력을 길러주었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고등 교과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지식도서를 완벽하게 이해하며 읽어본 아이에게 교과서는 쉬운 책에 불과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식도서를 탐독하는 청소년에게 교과서는 쉬워도 너무 쉬운 책일 뿐입니다.


지식도서를 탐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지식도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능력과 호기심. 우리 교육은 이 두 가지를 기르는 데 너무나 취약합니다. 그 결과 지식도서를 탐독하는 청소년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죠. 실로 멸종이라 할만 합니다.


지난 시대, 개천에서 났던 수많은 용들, 글로벌 리더들 중 그 누구도  지식도서를 탐독하는 청소년 독서가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습니다. 교육의 글로벌 스탠다드 역시 숙련된 독서가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지식도서를 탐독하는 청소년 독서가가 멸종해버린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개천의 용이 사라진 진짜 이유이며, 동시에 글로벌 리더를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딱 한 권으로 시작해보세요. 

6개월이 걸리든, 1년이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딱 한 권 만 제대로 읽으면 됩니다. 그러면 고등학교 교과서 정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본 자질이 몹시 나빴던 저 같은 사람에게도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준 방법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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