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그리고 독서실 옆, 동네 책방
“음… 여기가 맞는데…”
“왜 없지?”
지도앱을 켜고 또 상가 한 바퀴를 돌았다.
불현듯 ‘1층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그제야 상세 주소를 확인해 본다.
경기도 김포시 김포한강2로 76 402호.
서점은 4층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상가 안에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층별 안내도를 눈으로 읽어 올라가는 순간 유독 반복되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xx 수학 학원
xxx 어학원
xx 논술 학원
바로 ‘학원’이다.
책방으로 가는 길에 학생들이 유독 많이 보이긴 했지만, 근처에 학교와 대단지 아파트가 있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학원이 많은 상가 안에 동네책방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중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남학생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5층을 누르곤 구석진 곳에 몸을 기댄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 한 손에는 편의점 봉지.
편의점 봉지에는 컵라면과 에너지 음료가 들어있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을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내 눈에는 한참 어려 보이기만 한 아이의 깊은 한숨 소리에 내 마음도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게 적막이 흐르는 엘리베이터를 떠나보낸 후, 도착한 4층.
첫 느낌이 상당히 묘했다.
학원, 독서실 그리고 책방.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조합을 지금 마주했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에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 그리고 겹겹이 쌓여있는 책들을 보며, 동네 책방이 아닌 연구실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교수님 방이라고 해야 할까?
책방 주인으로 보이는 책방 지기 또한 매우 분주해 보였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쌓여있는 걸로 봐서는 오늘 들어온 신간 정리로 정신이 없는듯했다.
때마침 손님이 나 혼자였기에,
마음 편히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시집 읽고 느낌을 나누는 시간 ‘詩時(시시)한 모임’
고전 100권 읽기 ‘고백독서클럽’
과학책 낭독모임 ‘푸른먼지들’
청소년 글쓰기 모임 ‘쓰고, 읽고, 아무 말하지 않기’
황진희 선생님과 함께하는 ‘서로의 그림책 테라피’
성인 그림 클래스 ‘mam.을 따뜻하게 하는 그리기’
모두 책방 짙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작은 동네 책방에서 이렇게나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많고 많은 모임 중에, 한 모임이 눈에 들어왔다.
쓰고 읽고 아무 말하지 않기…?
‘쓰고, 읽기까지 했는데 왜 아무 말을 안 하는 거지?’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책방 지기에게 물었다.
“근데.. 이 모임은 왜 아무 말을 안 해요?”
“아이들은 본인이 쓴 글을 평가받는 걸 상당히 두려워해요.
그래서 쓰고, 읽기 까지만 하고 아무 말하지 않기로 약속한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을 위해, 오로지 본인의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글쓰기 모임이라니.
책방 지기의 세심함과 다정함이 묻어나는 모임이다.
책방 지기는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 이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의 글이, 그 '때'여야만 하는 글이, 오래 반짝거릴 글들이 몹시 읽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쓰고 읽고 아무 말하지 않기 모임을 만들었어요.
이슬아 작가는 글쓰기 교사로 보낸 시간 동안, 오히려 본인이 아이들에게 배운 게 더 많았다고 했다. 쓰고 읽고 아무 말하지 않기 모임에서 쓴 아이들을 글을 찬찬히 읽다 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책방 짙은에서는 글쓰기, 책 읽기 모임뿐만 아니라 작가님들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북토크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해방일지를 쓴 드라마 작가 박해영 작가와의 만남을 가졌는데, 작가님의 인기를 실감하듯 오픈되자마자 금방 매진돼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다.
인기 드라마 작가님을 섭외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책방 지기님의 열정과 실행력이 대단하다 생각했다. 물론 거기에는 20년 덕질의 힘도 숨어있다.
박해경 작가는 드라마를 쓰기 전, 10년 동안 시트콤을 썼던 작가였다. 그녀가 쓴 수많은 작품 중에는 <올드미스 다이어리>가 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책방 지기의 인생 시트콤이라는 것.
좋아하는 마음은 끌어당기는 힘이 세다.
책방 짙은을 보면 그 힘을 느낄 수 있다.
"책이 좋아서 공간을 만들었을 뿐인데, 벌과 나비들이 꽃을 찾아 날아들 듯 저절로 사람들이 모여서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가꾸어 나갑니다. 책방은 그런 곳이네요. 누군가가 무엇이든 하자고 하면 할 수 있는, 하게 되는 마법 같은 곳."
책방을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는 책방 지기는 그 용기 또한 책을 통해서 얻었다고 했다.
<미움받을 용기>,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그리스인 조르바>, <Leo the Late Bloomer>
책 한 권 한 권을 테이블에 펼치며 어떤 장면에서 큰 울림을 받았는지, 조근조근 소개해주는 책방 지기님의 눈빛이 아직도 강렬하게 기억 남는다.
좋아할수록 짙어지는, 책방 짙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고, 만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삶의 풍요를 나누는 것과도 마찬가지.
이 작은 공간에서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해보며 책방을 나섰다.
책방 짙은에서 사 온 책
-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책방 지기 추천
: 카르페디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조르바를 통해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어요.
-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책방 지기 추천
: 그림과 글이 매우 따뜻해서, 품에 꼭 껴앉고 싶은 그림책이예요.
책방 짙은(@zitn_books)
위치: 경기도 김포한강2로 76, 프레즌스빌딩 402호
운영시간: 월 10시30분~19시, 화수목 14시~19시, 금 15시~01, 토 13시~18시
(자세한 운영시간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확인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