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왜 방구석이라고 했지? 미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미술사, 미학이라는 턱이 높은 학문분야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사전에 공부하지 않으면 유럽에 미술관에 있는 유명한 미술작품을 봐도 크게 감흥이 오지 않는다. 제목처럼 '방구석'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미술을 마치 친숙한 잠옷 입고 편안하게 미술작품을 바라보자는 의미이다. 현대미술의 뿌리와 씨앗을 갖고 있는 반 고흐나 폴 고갱 같은 친숙한 근대미술가 14명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멀게만 느껴졌던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으니 한 미술 작가가 어떤 시대적 상황에 놓여있었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작품 안에 녹여냈는지 가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즉, 미술 작품에 대한 해설보다는 근대작가 14명의 예술가의 삶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TV 책방 북소리>에서 조원재 작가가 나온 방송을 챙겨 보았다. 미술을 사랑해서 ‘미술관 앞 남자’가 된 남자. 줄여서 ‘미남’이라고 불린다. ‘미술은 누구나 쉽고 재밌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팟캐스트 <방구석 미술관>을 진행하고 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미술을 독학했다고 하니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작가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에곤 실레'의 작품 <앉아있는 남성 누드>를 보고 상당히 강렬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았던 그. 어린 그에게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경험하고 아버지는 우울증마저 걸린다. 예술은 그에게 죽음을 승화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병마와 죽음 그리고 가혹한 삶을 그림 위에 쏟아내었다고 한다. 그가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그것을 예술로써 극복한 것. 내면의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애썼던 작가. 이제 <절규> 앞에서 그의 삶이 그려질 것 같다.
프리다 칼로를 검색해 보니 미인이다. 미술계 여성의 혁명가, 루브르가 선택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화가로 불린다. 하지만 소아마비, 교통사고, 바람둥이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2번의 유산 같은 고통의 여왕이라 불리는 수난이 반복된다. <단지 몇 번 찔렀을 뿐>이라는 작품은 마치 그녀의 남편 디에고의 여성편력이 얼마나 심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굴곡진 인생을 생각하니 너무 안타깝다.
'파리 한복판에서 수도승의 삶을 살았던 드가. 그는 사랑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었지만 예술을 위해 평생 역설적이게도 그의 예술은 그가 평생 멀리했던 대상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바로 '여성'입니다.' (70쪽)
발레가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빈민가 소녀들의 몫이었다는 것. 그리고 발레리나는 무대 뒤에서 성을 위한 상품으로 전락했다는 것. 무대 뒤편에는 은밀한 그녀들의 삶이 있다는 것. 그것을 드가는 잘 포착해서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왠지 음산한 느낌이 보인다. 그렇구나. 이제 보니 발레리나를 어떤 시선으로 그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압생트는 녹생 요정이라고 불렀던 허브의 주원료로 만든 파리의 국민 소주였다고 한다. 주원료는 과다 복용 시 부작용이 있었는데 바로 '황시증'이었다고 한다. 세상이 노랗게 보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노란색이 눈에 띄게 많았나 보다. <해바라기>과 <노란 집>이 대표적이다.
소중한 가족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그림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고전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에서 철학과 개성이 빠져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빈 미술가 협회의 전통을 답습하는 주류 세계의 미술 즉 아카데미 미술을 거부하고 반항아가 되기로 결심한다.
폴 고갱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진보주의자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페루 소년'이 된다. 6년 동안 뜨거운 태양 페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나 보다. 성인이 되어 프랑스에서 증권맨으로 활약하지만 그는 돈을 많이 버는 증권맨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즉, 퇴사를 꿈꿔왔다. 당시 유행했던 그림을 추종하며 답습하지 않았다.
'하나의 삶은 하나의 별이 아닐까요? 삶을 보는 관점과 삶을 사는 방식은 이 지구의 수만큼 다채롭고 빛나고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각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삶의 빛'이 있을 뿐이죠' (197쪽)
'고갱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그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꿈을 그리는 행위가 된 것이죠'(187쪽) >> 참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자연과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그는 타히티로 간다. 그래서 그림에 타히티와 유럽이 반반씩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네는 땅부자인 귀족의 자제이었다고 한다.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이 마네를 치켜세웠다고 한다. 바로 동시대 사람을 처음으로 그린 화가라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각 시대는 자신만의 자세와 시선, 몸짓을 지니고 있다' , '동시대를 표현하라'라는 보들레르의 생각이 마네에게 영향을 미쳤다.
'캔버스는 평평하다. 원근법을 버리고 평평하게 그리자. 단순함은 아름답다. 기존에 모네가 알고 있던 고정관념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혁명적인 생각이었습니다.' (245쪽) 19세기 화가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카메라가 등장한다. 하지만 모네는 모네 자신이 카메라가 된다. 눈은 렌즈, 손은 몸 그리고 팔레트는 감광판(셀룰로이드판)이 된다.
모리스 드니가 말 한대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와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에 이어 세잔의 사과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 법 공부를 하던 그는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 사과가 썩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니...
칸딘스키는 그야말로 엄친아다.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여 졸업과 동시에 법률 고시를 패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연애 찌질이었다고 한다. 6년 동안 연락을 끊었던 불륜녀 '뮌터'에게 자신의 물건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고 할 만큼 연애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칸딘스키는 엄친아였지만 끊임없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바로 '나는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뭘까? 나는 뭔가 동경하는데, 무엇에 대한 것일까'라고 말이다.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를 작품에 녹여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방구석에서 편히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예술가 즉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면 앞으로 더 미술작품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미술작가들은 자신에게 쏟아졌던 비난, 조롱, 고통과 슬픔을 견뎌냈다. 알고 보니 어느 하나 평범하게 살았던 미술작가는 없었다. 당시 미술작가가 어떤 시대적 상황에 놓여있었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작품 안에 녹여냈는지 가를 볼 수 있었다.
작품은 그들의 삶을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