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고해이기만 할까? [긴긴밤]

당신에게 동화책을 권합니다 2

by 책꿈샘 김지원


"선생님, 차 한 잔 해요!"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힘들고 지쳤던 교직 생활에 항상 그들이 있었다. 초등교사로 20년 근무를 했고, 현재는 퇴직한 지 3년째이다. 돌이켜보면, 신규 교사였을 때보다 퇴직 직전 1~2년이 고비였고 가시밭길이었다.


반 아이들이 뽑는 '칭찬 친구' 제도에 내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교무실로 민원이 접수가 되었고, 교사의 신념 따윈 민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수업 방해가 심한 학생을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학교 현실을 보았다.


그래도 감사했던 건 내 곁에는 좋은 동료 교사들이 많았다. 소소한 학급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들이 있었고, 학급 대표로 공개 수업을 해야 할 때에 앞장서서 앞 뒤 교실 게시판을 힘 모아 꾸며준 선생님도 있었다. 그리고 퇴직 직전, 교보위를 열었을 때 끝까지 나를 지지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았지만 또 사람들 때문에 위로도 받았다.


하여 삶은 고해이기만 할까?


돌이켜보면 인생의 절반을 보낸 교직 생활은 고해가 아닌 롤러코스터에 가까웠다.




루리 작가가 쓴 <긴긴밤>은 여전히 어린이 베스트셀러이다. 부동의 1위였던 흔한 남매와 겨뤄 최근 1위 자리를 재탈환한 동화계의 초초초베셀이자 어른에게 가장 권하는 동화책으로 언급된다.


인간에게 몰살당한 가족이 있기에 인간을 증오하는 코뿔소 노든,

그런 노든과 동행하게 된 양동이를 입에 문 치쿠 펭귄

그리고 양동이 안에 든 의문의 알.


이 기묘한 조합의 여정 앞에 인생의 필수템인 연대와 보살핌. 그리고 생과 사가 그려지는 동화이다.


이 동화책을 어른에게 권하는 이유는 긴긴밤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길에서 잊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숨은 법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 법칙이 꽤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법칙은, 타인을 알아간다는 일이 의외로 긴긴 밤을 잊게 만드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동화 속에서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의 동행은 애초에 계획된 선택이 아니었다. 두 존재의 만남은 예기치 못한 외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삶이 그렇듯, 우리가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가도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사건이 찾아오듯이 말이다.


거대한 외부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 위에서 만난 그들.

그러나 그 낯섦은 곧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새롭게 관계를 맺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가장 먼저 앞설 상황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가며 잠시 숨을 고른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과정이 공포를 완전히 없애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긴 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작은 불빛이 되어 준다.


"나는 새가 아니야. 펭귄이야."
"날개랑 알 때문에 새인 줄 알았어. 나는 노든이야."
"치쿠라고 불러."
"미안하지만 나는 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보다시피 나는 코뿔소거든. 뿔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코뿔소야. 그들이 잘라 냈어. 같이 살던 내 친구 앙가부가 뿔 사냥꾼에게 당했거든. 이제 나와 같은 코뿔소는 더 이상 없대. 내가 마지막에 남은 하나래. 우습지. 생각해 보면...." (P.55-56)


두 번째 법칙은, 때로는 유머가 삶을 덜 고달프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어리 눈곱만 한 녀석.”


펭귄 치쿠가 코뿔소 노든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정어리를 본 적도 없는 노든은 그 말을 듣고, 아마도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떠올린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웃게 된다. ‘정어리 눈곱만 하다’는 표현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지를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절박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치쿠의 말은 툭, 하고 튀어나온다. 그 한마디는 잔뜩 무거워진 공기를 가볍게 만든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웃음이 스며드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치쿠는 말끝마다 노든을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라고 불렀고, 정어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노든은 코뿔소만 한 눈곱을 가진 물고기라니, 얼마나 클지 상상도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P. 62)


셋째, 혼자가 되어 잘 살아간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같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알에서 깨어 난 새끼 펭귄과 노든이 각자의 길을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새끼 펭귄은 바다를 향해, 그리고 노든은 마지막 코뿔소가 되어 그토록 미워했지만 손을 내미는 인간이 만든 곳을 향해. 파란 지평선을 따라 온 세상이 파란색인 새끼 펭귄만의 세상 앞에서 내뱉은 독백은 혼자가 되어 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려준다.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의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 124)




막 서른이 되었을 때,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었다. 그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은 어렵다. 이것은 인생의 가장 위대한 진실이다.”


그때까지 큰 굴곡 없이 살아왔다고 믿었던 나에게 그 문장은 쉽게 와닿지 않았다. 인생이 어렵다니. 어쩐지 낭만이 사라지는 말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과장된 말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교사로 재직하며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결국 퇴직을 하고 삼 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요즘, 돌이켜 보니, 내 인생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는 알게 되었다.

기쁨도 있었지만, 마음이 무너질 만큼 힘든 날도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늘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든 순간마다 한바탕 울고, 또 실컷 웃었던 기억들. 그 시간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지금, 나는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꽤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하고 있다. 긴긴밤을 잘 견디는 인생 법칙을 조금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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