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회사 신입사원 시절, 임금 담당자의 실수로 몇 달간의 식비가 입금되지 않았던 적이 있다.
밥 만드는 회사에서 밥 값을 누락했다니 공분해도 모자랄 사태였지만, 아직 물정 모르던 신입이었던 나와 내 동기들은 그저 보너스가 들어온 거 같아 신이 났다. 연말에 한꺼번에 입금된 식비는 50만 원 가까이 었고, 저마다 이 애매한 금액으로 어떤 쓸데없는 소비를 할지 궁리했다. 불현듯 악기를 배워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야마하 연습용 플루트의 가격이 딱 그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입사원이 아닌가, 기대효과가 없는 일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라는 회사의 룰을 배워나갈 때였다. 마음속에 그려놓은 기대효과 칸에는 적을 것이 없었다. 대신 악기를 시작하면 안되는 이유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기 싫은 것들부터 우선 잘 해내 보고 싶어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바빠서,
사회 초년생인 내가 또 다른 분야의 초보자가 되는 것도 성가셔서,
결정적으로 이 나이에 배운 적 없는 관악기를 배운다는 것이 왠지 멋쩍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때 내 나이는 26살이었다.
그 이후로 대체로 괴롭고, 아주 아주 가끔은 안온한 고만고만한 회사원으로 지냈다. 출근하면 당연한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것처럼 행동하고, 퇴근 후의 삶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포자기한채로 살았다. 그런게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초년생에서 겨우 벗어난 삶은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플루트 같은 건 다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약 6년간의 자포자기는 오래된 옷처럼 너덜대고 가끔 나를 몹시 춥게 만들곤 했는데, 또 그만큼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어서 버리지를 못했다.
익숙함을 뺀다면 대체 이 옅은 무력감과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으므로.
그리하여 내내 갖고 싶은 것을 쉽게 까먹고, 해보고 싶은 것은 꾸준히 민망해했다.
해보겠다고 소리 내는 것이 물색없어서, 그 정도로 하고 싶은 건 아닌 거 같아서, 멋쩍어서. 단지 그런 이유로.
세상에 자기 자신만큼 속이기 쉬운 상대란 없다는 말을 가끔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날, 작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 둑을 무너뜨리던 날 회사를 나왔다. 대신 자신을 속이는 일들을 때려치고 삶에 새로운 것들을 들이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나는 그런 날을을 통과하면서 아주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
배운 것 중 하나는 세상에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시작해도 되는 일이 아주 많다는 것,
이유는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달라붙게 된다는 것,
그냥 시작하는 일들이 제 몫의 삶을 내게 돌려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겨우 여기 까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르렀다.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어떤 잔잔한 굴욕감이나 얕고 지속되는 상처를 참아가며 미래를 도모하는 능력이다.
예전에는 꽤나 잘해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을 잘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자주 걱정의 말을 해주기 때문에 아주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 '나이에 맞는 해야하는 일이 있는거야.' 같은 말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는 다른 삶의 행복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어른이 되면 좋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우리가 남을 향해하는 충고와 걱정이라는 것은 때론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가요?’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고맙다고 하고 웃는다. 다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6년 전 내 몫이었던 그 밥 값으로 악기를 샀으면 어떤 좋은 추억이 생겨났을까?
그 자리에서 시작해서 다른 많은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는 삼십 대가 될 수 있었을까?
그로 인해서 6년은 달라졌을까?
이미 지난 일이므로 부질없는 가정이다.
다만 조용히 생각한다.
앞으로의 날에는 자주 시작해보고, 어쩌면 내 것이었을지 모르는 삶의 작은 기쁨과 가능성들을 되찾아보겠다고.
기꺼이낡은옷을처분하고, 새로운색깔과효용을가진것들을삶에들이겠다고.
어느 해 생일, 스스로에게 6년 전에 사고 싶었던 악기를 선물했다.
생일은 그저 이 세상에 오래전에 태어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박수받는 날이므로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