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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Jun 10. 2021

먼저 움직이지 마라


가만히 생각해본다. 고질적인 무능함 속에서도 내가 지켜온 삶의 원칙은 무엇이었나. 다행히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기. 살아가며 내가 해온 일의 공통점은 “내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인생의 나이테가 한 줄 한 줄 짙어질 때마다 누군가 혹은 어딘가의 ‘제안’으로 일의 연속성을 이어갔다. 삶의 여정 중 어떤 것도 내가 자청하지 않았다. 


지금 내 일의 목록에 추가된 새 일도 그렇다. 요사이 나는 어느 기술기업의 제안으로 성수동으로 출근하고 있다. 수년 동안 집에서 나와 10분 거리의 개인 사무실을 걸어서 오가고, 움직여봤자 15~30분을 넘지 않는 범위를 운전하며 다니던 내가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뚝섬역으로 출근하고 있다. 안 하던 일을 하면 병이 난다고 했던가. 출근한 지 일주일 만에 급성 임파선에 걸려 고생했다. 그럼에도 매일 출퇴근을 하고, 혼자 일하는 편안함을 버리고 여럿이 협업하는 번거로움을 받아들이며, 출판이 아닌 기술기업에서 앱을 만드는 일을 선택한 건 ‘50’이라는 나이 때문이다. 여기에서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같이 해봅시다’라는 제안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이 팔자에 없는 짓으로 이어졌다. 


물론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내가 운영하는 회사와 다른 문화, 스프레드시트로도 모자라 잔디(JANDI)와 노션(notion)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월등히 많아진 미팅 스케줄을 받아들이는 일이 만만치 않다. 나이를 먹은 만큼 경력에 걸맞은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매일 새로운 일의 환경이 펼쳐지고, 최고령 연장자로 젊은 사람들과 일하는 와중에 어렴풋이 깨달은 게 있다면 ‘일은 결국 같다’는 것이다.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닌데도 기술기업의 서비스를 ‘제품(product)’이라고 이야기하듯이 일이란 '잘' 기획하고 '잘' 만들고 '잘' 알리고 '잘' 판매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늦은 나이에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일을 언제까지 할 지 모르겠다. 인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나의 방식이 클리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고독한 하이에나처럼 혼자 일하는 본성이 그리워 회귀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왕이면 제품을 만들고 알리고 판매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직접 확인하는 지금의 일에 재미를 붙이려 한다. 나의 역할이 일의 한 단계에 머무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일을 ‘연결’하는 나만의 터치가 가미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를 찾아준 또 한 번의 ‘제안’에 부끄럽지 않은 일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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