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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검 Jun 20. 2024

빨간색과 파란색

나는 왜 보고서 색깔을 바꾸고 있나?

보고서


사무직이 가장 싫어하는 소프트웨어는 파워포인트이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그렇다. 대기업에서는 수천 명이 사무실에 앉아 오늘도 보고서 문구를 고치고 보고서 색을 고친다.


물론 문서 정리는 필요하다. 지식과 생각을 글자로 정리하며 보다 엄격히 사실 관계를 바라보고, 나의 의견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파워포인트를 만들 때 이런 사고-정리-표현보다, 이미 만들어진 보고서의 수정-수정-수정에 걸리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직원-과장-부장-실장-상위 임원을 거치며 회사 계층 수에 따라 수정 횟수는 지수함수로 올라간다.


해외법인은 계층이 본사보다는 단순하니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보고서 작성의 압박은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중국어 보고서


우리 회사 주재원이 다 그렇듯 부서에서 혼자 한국인 주재원이고(주로 부장), 나머지 직원들은(주로 과장-사원) 중국인이다. 직원들은 보고서를 중국어로 써오고 나는 상사나 본사에 한국어 보고서를 제출한다. 언어도 문제이거니와 내용, 양식, 표현 방법이나 구성 로직이 한국 본사 스타일과 달라 어쩔 수 없이 주재원이 야근을 하며 보고서를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예전에 ‘비슷해 보이는 보고서를 자꾸 고치던’ 부장님이 생각난다. 지금은 내가 그 부장이 되어 버렸다)


해외법인 내에서만 보고할 보고서라면 굳이 한글본을 안 만들 때도 있다. 특히 나의 상사가 중국어를 장한다면 직원이 만든 보고서를 그냥 들고 간다. (감사할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보고서 내용 구성이나, 결론 부분에 대해서는 중국 직원을 불러 놓고 내가 이리저리 수정 지시를 한다.


중국 공무원들은 파워포인트 보고서보다 워드로 길게 쓰는 문장형 보고서를 선호하는 듯하다. 서문에 “하나의 사상, 다섯 개의 전략, 스무 개의 추진방안”과 같이 뭔가 멋진 말로 시작한다. 예전 “도광양회“, 요새 “이구환신”과 같이 전략이나 정책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갓도 좋아한다. 제갈량의 출사표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 회사 중국 직원들은 한국 기업 문화에 따라 파워포인트를 만들며, 나의 요구에 수정 또 수정을 한다.


빨간색과 파란색


직원들 보고서를 수정하다보면 색에 대한 차이를 느낀다. 한국에서는 중요한 부분은 파란색, 나쁘거나 위험한 부분은 빨간색으로 표현한다. (회사에서 가장 나쁜 건 빨간 숫자, 즉 “적자”아닌가?) 반면 중국 직원들은 중요한 부분을 빨간색으로 칠해 온다. 파란색은 기타 표시 수준이다.


생각해 보니 중국에서 빨간색은 당과 국가를 상징한다. 정부 정책 문서, 규범 문서도 빨간색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그런 문서들을 “빨간색으로 시작하는 문서”(红头文件)라고 통칭한다. 그래서 빨간색은 권위의 상징이다. 그런 권위 있는 색을 나는 항상 다시 파란색으로 바꾸라고 지시한다. 아니 그래 왔었다.


나는 오늘도 색깔을 바꾼다


여러 번 고치라고 해도 매번 직원이 쓰는 보고서은 재목이 빨간색이고, 중요 표현 하이라이트가 빨간색이다. 우리 부서에는 당원(공산당원!)이 많이 않은데도 이란 걸 보면 빨간색은 중국인의 관념과 습관 속에 깊이 박혀있는 듯하다. 홍군, 홍기, 홍서처럼 빨간색은 중국에서 혁명을 상징한다.


이제는 중국 직원에게 지시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나 혼자 조용히 보고서 색을 바꾼다. 신호등도 파란색은 Go, 빨간색은 위험하니 Stop 아닌가. (참고로 한국에서 지금은 신호등이 초록색이지만, 예전에는 파란색이어서 지금도 초록색을 파란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국도 신호등은 빨간색이 Sto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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