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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Mar 21. 2024

나 어릴 적

아주 어릴 때 난 대구 외할머니 집에서, 동생 지용이는 안산 할머니 집에서 살았다. 맞벌이를 늦은 밤까지 하는 엄마아빠가 연년생 아기 자매를 돌보기란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일터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는걸 보면, 일터에라도 데려가서 어떻게든 일과 육아를 병행하려고 했나 보다. 언젠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엄마가 내게 너희 제일 예쁠 때 엄마가 못 데리고 있었어,라고 한 적이 있다. 기억의 부스러기를 모으려 애쓰는 누군가의 표정을 제대로 마주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시절 엄마가 자주 지었을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사이 내 마음까지 쓸쓸해졌던 적이 있다. 그래서 굳이 엄마에게 우리 자매가 어릴 때 어땠는지 물어보는 질문은 잘하지 않는 편이다. 우리 자매가 첫 뒤집기, 첫 걸음마, 첫 달리기 따위를 해낸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들었을 엄마는 참 속상했겠다, 지레짐작만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놓쳤어도 내가 떠올려 전할 수 있는 추억들을 여기에 적어보고자 한다. 태어나는 순간, 신생아에서 유아로 가는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대목에 있어서는 기억이 전혀 없다. 그 시절의 나는 생글생글 잘도 웃어서 동네 사람들이 나 웃는 걸 보려 외할머니 집에 놀러 왔다고 한다. 아마 타고나기로는 낙천적인 성격이었나 보다. 첫 일화는 아마 네다섯 살 때의 일이다. 대구 집은 옛날 드라마에 자주 나오곤 했던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모든 방이 1층에 있고, 시멘트가 엉성하게 발려있는 마당에 초록색 호스가 끼워진 수돗가가 있는 집이었다. 새벽마다 출근을 앞둔 외할아버지, 세 명의 외삼촌들은 수돗가에서 면도를 했는데 왜인지 나도 면도를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더랬다. 창호문 틈 사이로 몰래 면도하는 걸 어설프게 익혀뒀다가, 출근하는 어른들보다 일찍 일어나 오랜 계획을 감행했다. 코 아래 인중을 면도기로 쓱쓱-, 외할아버지처럼 능숙한 표정으로 쓱쓱- 면도를 한다고 했는데. 아뿔싸. 면도날이 지나간 길을 따라 핏물이 흘렀다. 피를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라 너무 놀란 마음에 꺅- 소리를 지르며 울었던 것 같다. 꼭두새벽에 잠에 빠져있던 식구들은 이상하게 울부짖는 소리에 급히 일어나 나를 살폈다. 그런데 그때 말이다. 누가 분명 웃고 있었다. 면도하는 게 멋져 보여서 그걸 진짜 해본 나의 엉뚱함에 웃음이 빵 터졌나 보다. 대체  왜 웃지. 속상한 마음에 웃는 사람을 꼭 찾아내려고 했는데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얘서 결국 못 찾아냈다. 나 빼고 다 웃었겠지, 아마.


다음 이야기는 여섯 살 즈음 때의 일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아랫도리가 이상하게 따뜻하고 축축했다. 두꺼운 솜이불을 충분히 적실만큼 아주 넉넉하게 오줌 지도를 그린 것이었다. 다행히 아직 이불 속이었으므로 혼자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었다. 마침 그 방엔 나 말고 외삼촌 세 명이 같이 자고 있었다. 나이 스물이 넘어서 이불에 오줌을 쌌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기에 가장 적합한 외삼촌은 누구일까, 진짜 심각하게 고민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첫째 외삼촌과 둘째 외삼촌은 자다가 오줌을 누기에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바로 막내 삼촌이 오늘의 오줌싸개로 딱이었다. 막내라면 오줌을 쌀 법도 하지, 엄청 결의에 차서는 이불을 자신 있게 확 펼치면서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외쳤다.


6세 안화용: 아니 이게 뭐지! 오줌인가?

막내 삼촌: 뭐꼬, 누가 아직도 오줌을 못 가리는데.

큰 삼촌: 아 찌린내 어쩔 건데.

둘째 삼촌: 이불 빤 지 얼마 안 된 거 아니가?

외할아버지: (짜증 난 표정으로) 왜 왜 무슨 일이고. 대체 누고.

외할머니: (웃으며) 오줌싸개 찾아가지고 동네 돌면서 소금 얻어와라 해야겠네.


외가댁 식구들의 시선이 오묘하게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외쳐야 한다는 걸 알았다. 바로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절박하게 뱃심으로 온 힘을 다해 외쳤다.

6세 안화용: (눈을 세모나게 뜨고) 막내삼촌이 오줌싸개예요! 내가 삼촌이 오줌 싸는 거 다 봤어요!

외가댁 식구 일동: (정적 그리고 눈빛 교환)


큰 삼촌: (막내 삼촌을 때리며) 야 이노무 시키야, 니가 나이 서른이나 처먹고 아직도 오줌을 찔기나.

둘째 삼촌: (막내 삼촌을 때리며) 자기 전에 물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했제. 고등학생 때도 오줌 싸더만, 아직도 못 고쳤나.

막내 삼촌: (잠시 망설이더니 머리를 주먹으로 콩- 하며) 아 맞나, 그래, 내가 쌌지. 맞다. 내가 지릿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배를 잡고) 웃긴 놈일세. 우리 막내 언제 정신 차릴고.

6세 안화용: (눈을 크게 뜨고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러니까요. 헤헤. 삼촌이 나보다 못하네.

막내 삼촌: (지긋이 바라보며) 맞다, 맞다. 우리 화용이가 삼촌보다 훨배 낫네.

6세 안화용: (아랫도리가 노랗게 물든 내복바지를 입은 채로 씩 웃으며) 으흐. 으흐.


진실은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외가 식구들을 속이는 데에 성공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을. 대본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 즉흥연기를 펼치는 베테랑 연극배우처럼 평생을 살을 부대끼며 산 그들의 능청은 합이 참 잘 맞았다. 그 연극의 관객은 오직 한 명, 실수에 유독 마음을 졸이던 여섯 살 아이였던 것이다. 만약에 엄마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연극의 막을 올리기도 전부터 내 등짝이 벌게졌을 거다. 나만 빼고 웃던 사람들로 가득하던 연극 같은 순간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 시절이 참 그립다. 외할머니가 취미로 모으시던 찻잔이 가득했던 주방의 선반들, 빨래터에 따라가 냇가에 새끼 손가락을 퐁당 담가보았던 일, 외가댁에서만 나던 쿰쿰한 향기, 그리고 또. 또… 기억은 안 나도 나를 이루고 있을 조그맣고 하찮은, 그 순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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