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안경원 아저씨와의 안녕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글

by bookphoto

내가 처음 안경을 쓰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책 좀 읽어!”라는 말보다는, “책 그만 읽으라고 했지?”라는 말을 듣곤 했다. 책 읽기를 멈추게 하려고 늦은 밤 엄마가 집 안의 모든 불을 꺼버리면, 나는 과학상자 속 꼬마전구로 전기회로를 만들어 반딧불보다도 희미한 꼬마 빛에 책을 비추어 키득거렸다. 그러니 눈이 나빠졌을 수밖에. 미간에 주름을 주어야만 흐릿한 시야가 또렷해졌던 여덟 살, 어린 시절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아마도 도수 높은 안경이었을 거다. 고지식한 아빠는 어린아이가 무슨 안경이냐며 내가 안경 쓰는 것을 반대했고. 그래서 나는 더 심한 주름을 주어가며 “저 아이는 인상이 좋지 않아. 항상 인상을 쓰고 있어.”와 같은 동네 어르신들의 나쁜 평판을 얻게 된 아홉 살에서야 안경을 득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과는 달리, 안경 쓴 2학년이 흔하지 않았던 90년대에 울 엄마는 큰 용기를 내어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손을 잡고 그곳으로 향했다. 경남 마산 지하상가의 ‘독일안경원’으로.


그 당시에는 독일이 유행이었는지, 독일빵집이 있던 동네 어귀에 ‘독일안경원’이 생긴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독일에는 무언가 끌리는 그 무엇이 있었다. 새천년이 밝아오던 세기말을 살아가던 울 엄마가 천리안안경원, 밀레니엄안경점을 제껴놓고 독일안경원을 택한 것에는 독일이라는 나라가 주는 브랜드에 대한 믿음직함이 크게 작용했을 거였다. 자동차를 튼튼하게 만드는 나라는 빵도 맛있게 굽고 안경도 가볍게 잘 만들 거라는. 아니면 우리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그냥 간 것일 수도 있지만. 암튼 나는 독일안경원에서 생애 첫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안경원의 이름처럼 사장 아저씨는 독일에서 안경을 만들다 온 장인처럼 생긴 듯했다. 내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일 정도로 길쭉하고, 삼 대 칠 정도의 가르마로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용모에, 젠틀한 매너까지 갖춘 아저씨는 독일안경원이라는 이름을 내건 가게를 가질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사람 같았다. “안녕?” 하고, 겨우 어린 나를 진정한 고객으로 대우해주는 인사를 받았을 때에는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시력검사판 앞에 섰을 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결국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엄마 손을 꼭 잡았다. 내 시력은 생각보다 더 나빴다. 나비인지,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동물 모양을 알 수 없었다. 왼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글자가 뱅글뱅글 흔들흔들거렸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시력이 나쁜 건 안경사 인생에 처음 본다며 아저씨는 탄식을 내뱉었다. 엄마와 나는 마치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저씨가 내민 못난이 안경. 여러 렌즈를 겹쳐가며 내 시력을 정밀하게 맞춰보는 도구였다. 못난이 안경에 아저씨는 동그란 렌즈를 겹씌워보더니 안경점 안,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모델처럼 걸어보라고 했다. 처음 느껴보는 어지러움에 비틀비틀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무슨 모델이야, 하며 매장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워했던 느낌도 떠오른다.


그렇게 이십 년, 독일안경원을 다녔다. 아저씨가 내 이름을 잊어버릴 때쯤, 신기하게도 내 시력은 나빠졌다. 안경을 바꾸면 아저씨가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시력이 나빠지면 안경을 바꾸러 가고. 멋을 내기 시작한 이후로는 콘택트렌즈를 사고. 그렇게 우리는 안경사와 안경원 고객으로서의 거리를 유지했다. 어쩌면 아저씨는 가난한 학생이었던 나의 처지를 너머 너머 아시는 듯했고 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의 안경 값을 깎아주시고는 했다. 남은 돈으로는 먹고 싶은 것 사 먹으라며. 힘겹던 시절을 지나 교대에 진학하고, 교사가 되어 내 일을 구했을 때에는 나의 늘 취해있던 아버지보다도 어쩌면 반가워하며 본인의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그리고 나 역시 건너 건너 아저씨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노환으로 눈이 안 좋으셔서 당근을 잘 챙겨 드신다는. 참 아저씨답다는 생각에 풋, 하고 웃음이 났다. 학생으로서의 방학 때도, 교사로서의 방학 때도 가끔씩 들러 몇 달치의 렌즈를 사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랬던 우리가 안녕을 고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렌즈삽입술 때문이었다. 열심히 돈을 벌고 모아 나는 독일안경원의 고객이 되는 일을 그만하게 된 것이었다. 왠지 아저씨께 이 소식을 정식으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았다. 독일안경원에 인사하러 가는 만큼, 독일빵집에서 기념 빵을 사고 싶었는데. 긴 세월 동안 독일빵집은 쇠하고 말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적절한 속담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파리바게뜨에서 산 롤케이크를 사 들고 독일안경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찾은 안경원에서의 기념비적인 순간에 아저씨는 또 내 이름을 잊어버리셨는지 “가만 보자, 내가 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이. 뭐더라. 북..”하고 말끝을 흐리셨고 우리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빵을 사 온 순간에 빵, 하고 터지다니.(요즘 부장 일을 하고 있어 부장 개그에 빠져있다. 치는 사람은 참 재미를 느끼는 것이 부장 개그다.) 곧 렌즈삽입술을 앞두고 있다고, 아저씨께 소식을 전했는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려고 해서 푼수같이 나는 울고 말았다. 아저씨의 눈시울도 조금은 붉어졌다. 아빠 뻘 되는 아저씨와 나는 우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그 뒤로 아저씨를 못 뵈었느냐. 그건 아니다.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사러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방학마다 집에 내려가면 독일안경원이 건재하는지, 아저씨가 잘 계신지 확인하게 된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내가 소중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안녕일까.


독일 하면, 안경원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