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우습고 애틋한 나의 가족
그러니까 막 임용을 합격해 사회초년생이 된 스물넷의 내가 외삼촌과 살게 된 것은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함이었다. 1년 전, 서울로 임용을 치고 싶어 가산점이 부여되는 컴활 1급도 독학으로 따두었던 터였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돈이 많이 든다는 엄마의 만류로 나는 고향으로 시험을 쳐야 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시골과 서울 사이 그 어디메쯤으로 엄마와 얼른 합의를 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영 가족과 함께 살게 될 터였다. 둥글면서도 안쪽으로는 모가 나있는 엄마와 뾰족하면서도 깨지기 쉬운 내가 함께 사는 것은 스무 해를 넘긴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사이좋게 엄마를 오래오래 보기 위해 나는 엄마와 떨어져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를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합의 카드가 필요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건 나의 조커, 막내 외삼촌이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피자를 사먹을 돈이 부족할 때도, 대학생 때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갈 돈이 떨어졌을 때도, 새 핸드폰이 필요할 때도, 대학교 등록금이 부족할 때도 나의 조커는 언제나 진짜 ‘카드’가 되어 오아시스 같은 경제적 지원을 해줬다. 그런데 그 조커 카드를 이 상황에서까지 떠올릴 줄은 나도 몰랐다. 정말이지 나만 알고 어렸던 나는 얼레벌레 엄마를 설득할 요량으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버렸다. “외삼촌이 있는 대구로 시험을 칠게요.”라고.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내 월급을 몽땅 엄마에게 보내겠다고. 나는 그렇게 에이스 카드인 자유를 지키려고, 나의 조커, 외삼촌의 생각은 묻지도 않은 채 어리둥절한 동거의 서막을 열어버렸다.
우리의 동거는 이상하고 우스웠다. 가족을 주제로 스피드 퀴즈를 하는 덤앤더머와 같았다. 나는 내 주변의 경비원 할아버지, 옆집 아줌마, 우리 학교 사람들, 외삼촌 회사 사람들, 길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이상한 가족인 것을 알아채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외삼촌과 나는 꽤 오래전부터 친한 사이인 줄 알았는데, 우린 사실 장기간 경제적 교류를 해온 미적지근한 사이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 건 겨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외삼촌도 그 사실을 깨닫고는 내게 이상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헛기침으로 인사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삼촌 퇴근했다. 에헴.”
이 헛기침은 삼촌에게 인사하러 오라는 신호였다. 마치 오랜 야근을 하고 퇴근한 아버지를 맞이하듯 삼촌은 내가 설레발을 떨며 반갑게 맞아주길 기대한 것이었다. 나는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로 인사를 강요하는, 특히 술이 얼큰하게 취한 남자 어른을 마주하는 것에 불편한 기분이 들곤 했기에, 처음 몇 번은 응대했지만 그 뒤로는 초인종 소리가 울리면 방문을 빠르게 닫고는 자는 척을 했다.
“북포토 자나보네. 에헴, 에헴.”
민망함을 알리는 외삼촌의 혼잣말과 헛기침 두 번이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집 안에 맴돌았다. 그렇게 몇 번을 인사를 못 받은 삼촌이 냅다 방문에 대고 나 들으라고 “북포토!” 하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왜 인사 안 하냐고. 그 일은 내가 냅다 울어버리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가까워져야 할지 모르는 난처한 사이였다.
두 번째는 마치 엄마가 된 듯 나의 배고픔을 묻는 거였다. 울 엄마는 어린 나이에 공단에서 일을 해서 모은 돈을 외할머니에게 모두 주곤 했다. 그러고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은 정말 얼마 없었던 그때에, 어린 외삼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고 짜장면을 사주곤 했단다. 어쩌면 나에 대한 외삼촌의 애정은 울 엄마에게 얻어먹은 짜장면, 선물 받은 운동화 따위에 대한 부채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이 나의 배고픔을 묻는 것도, 외삼촌의 집에서 흔쾌히 살게 해준 것도 엄마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게 아닐까, 하고 느꼈다. 그래서 늦은 밤 내게 묻지도 않고 치킨, 족발 따위를 시켜 인생을 논하는 외삼촌과의 시간이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부양하며 40대 후반이 되어버린 외삼촌이 나의 먼 미래 같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외삼촌과 가까워지는 게 불편한 마음이 들곤 했다. 나보다 술도 못 마시면서 소주 몇 잔에 달큰하게 술에 취해 “너는 외삼촌처럼 살면 안 돼.”라고 말하는 모습이 괜스레 밉고 못나 보였다. 거기에 삼촌이 시키는 배달음식은 식어서 맛까지 없었다. 배달음식이 도착하고도 외삼촌이 나를 부르는 데에는 용기낼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만의 ‘문화가 있는 날’을 주최하는 거였다. 외삼촌에게 문화란 연기나는 고깃집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마치 회식 약속을 잡듯 외삼촌은 일주일쯤 전에 내게 일정을 물었고 내가 컨펌하면 우리의 ‘문화가 있는 날’은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매운 꼼장어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던 날이었다. 별 말 없이 꼼장어를 굽고 소주 한 잔을 마시며 둘 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하하 호호 웃다가, 가족들 욕도 실컷 하고, 서로의 노후 걱정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나는 외삼촌의 멋쩍은 웃음에서 문득 아빠라는 느낌을 감각하곤 했다. 아빠와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하고는.
외삼촌이 각고의 노력을 했음에도 우리는 결국엔 친해질 수 없는 사이 같았다. 별거하는 부부, 하우스메이트, 하숙집 아주머니와 하숙생, 다툰 친구 사이보다도 데면데면한 상태로 우리는 서로의 생사만 묻고 지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서로 친해지기를 포기할 때 즈음, 사건이 발생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심지어 울 엄마도 모르게 외삼촌이 치질 수술을 하고, 입원했다가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화장실만 가면 희미하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는 수술 부위가 많이 아픈 듯 했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는 외삼촌의 부탁이 있어서 나는 무엇을 챙겨줘야 할지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기 시작했다. ‘치질 증상’, ‘치질에 좋은 음식’, ‘치질에 좋은 자세’ 따위를 요약정리 후 프린트해서 누워있는 외삼촌에게 건네줄까 고민하던 중에 외삼촌이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노트북을 얼른 닫았다. 수술 부위가 아파서 새우처럼 등이 굽은 외삼촌은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네가 쓰는 그거 있잖아. 그거 좀 사다줘라.”
“그게 뭔데요?”
“그거 있잖아, 왜. 여자들. 그거.”
“아...... 아! 알았어요. 오케이. 접수 완료.”
외삼촌의 부탁에 나는 호기롭게 슈퍼로 향했다. 왠지 내 할 일을 찾아 하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만 알고 있는 삼촌의 비밀을 돕는 기분은 참 산뜻한 유의 것이었다. 이왕이면 대형마트가 좋겠다 싶어, 오래 걸어 작은 슈퍼를 지나쳐 그곳에 도착했다. 이때 의문점이 하나 들었다. 과연 외삼촌의 수술 부위에서 출혈이 어느 정도로 심각할 것인가. 생리대 대형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오버나이트 정도는 되어야 하나? 내 머릿속 알고리즘은 응답했다. 아니라고. 수술을 했는데 엄청난 출혈이 있지 않겠냐고. 고개를 사방팔방으로 휘저으며 시선을 돌리던 내 눈에 포착된 건 명확한 해답이었다.
‘디펜드 스타일언더웨어 팬티형 요실금 패드 남녀공용’
그렇다. 요실금을 위한 성인용 기저귀였다. 크기가 엄청났다. 이 정도면 홍수 같은 폭풍 출혈에도 끄떡없을 거였다. 화장실만 가면 내게 들키지 않으려고 끙끙 신음하던 외삼촌의 수술 부위를 아주 거뜬하게 막아줄 수 있는 솔루션이었다. 아마 기저귀가 필요했겠지만 삼촌이 말하기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겠지 싶어서, 나는 한 달 정도 쓸 수 있을 양의 기저귀를 자신 있게 사들고 팔뚝에 힘을 줘가며 뚜벅뚜벅 집으로 걸어갔다. 동네 사람들, 제가 바로 치질 걸린 외삼촌 보살피는 조카입니다, 라고 외치듯.
삼촌은 내가 사온 기저귀를 보더니 질색팔색을 했다.
“이렇게까지 (피) 안 나는데. 니가 쓰는 그거면 된다. (엉엉). 이거는 가서 환불해도~. 니가 쓰는 그거 빌려줘라.”
그렇게 치질 사건으로 함께 비밀을 나누면서, 우리는 좀 친해졌다. 외삼촌이 먼 지역의 아파트를 사서 나가게 되면서 부동산에 우리가 살던 집을 내놓았고, 내가 먼저 이사를 나와 독립을 했다. 엄마로부터 전해듣기로는 이삿짐을 야무지게 다 싼 줄 알았는데 내 신발 한 짝을 외삼촌 집에 두고 나왔다고 했다. 대구 집이 팔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외삼촌은 가끔씩 그 신발을 나 삼아서 소주를 한 잔 했다고 했다. 가끔 울었다고도 했다. 나는 외삼촌에게 늘 받기만 한 이기적인 조카였는줄 알았는데, 어쩌면 내가 그에게 소중한 무엇을 주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을 흘리니 남자친구가 내게 “외삼촌 살아계시지?”라고 묻는다. 외삼촌은 물론 살아있고, 이제 50대가 되었고, 유전인 탈모를 가리려 얼마 전 파마를 했고, 설날에 나와 영상통화를 하며 생사를 묻고 답했다. 우린 여전히 이상하게 우습고 애틋한 가족이다. 나의 조커, 외삼촌의 안부는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