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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May 21. 2016

[텔레비전이 어른 만들어 주나?]

- 이 시간부로 사이비 인문학에 대한 경보를 발동합니다

케이블 방송 채널인 TVN에서 방영하는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특강 테라피'라는 부제가 달린 프로그램으로 역사나 인문학 강의를 하는 방송이더군요. 저는 최진기라는 학원강사가 진행하는 인문학 강의를 시청하게 됐습니다. '인문학 강의 1탄'이라고 하니 이어서 계속 하는 것 같았는데 챙겨보지는 않아서 그 다음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진행하는 인문학 강의 1탄이라는 것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Smile의 웃음이 아니라 Laugh at의 웃음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최 강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인문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철저히 기업과 자본이 활용 가능한 '수단'으로서의 기술과 지식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요. 아예 본인이 대놓고 방송에서 그러더군요. 워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인문학은 필요없다"구요. 그런데 인문학 강의라고 하고 앉아있으니 Laugh at하지 않을 수 있을 수가 있나요.


인문학은 무엇일까요? 딱 쉽게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대략 인간의 사상과 감정, 문화 등을 다루고 연구하는 학문쯤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기업과 자본의 이윤을 늘리거나 개인의 생존과 출세를 위한 지식과 지혜를 얻기에 인문학은 어째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안 팔렸던 것'입니다. 시장에서의 생존이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하는 자본의 논리와 인간의 가치를 제일 상위에 두는 인문학이 병존한다는 것은 모순이니까요.


이처럼 안 팔렸던 인문학에 대해 최 강사는 다르게 말합니다. 인문학이 대기업 임원 교육에서 빠지지 않고 있고,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생산과 마케팅 등에 활용되고 있다고 말이죠. 애플과 스티브잡스가 인문학적 소양, 관점을 활용해 성공했다던지 구글이 인문학 전공자를 5천명이나 채용했다는 사실 등을 나열하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그의 인문학'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안팔리던 인문학이 왜 팔리는 것이며 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 강사가 왜 인문학을 그렇게 강조했는지는 금방 드러납니다. 그것이 죽어가던 기업 레고의 매출을 회복시켜주었고, 아이폰을 구매한 사람이 애플워치를 또 구매하게 만들었으며, 먼 곳까지 가서 이케아의 가구를 사고 직접 조립까지 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각 개인에게는 인문학을 전공해도 구글같은 세계적인 기업에 입사할 수 있고, 임원이 되면 꼭 갖추어야할 소양 혹은 능력으로서 테스트 된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소위 '스펙'으로서의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요.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이제 독자님들도 최 강사의 강의가 왜 인문학 강의가 아닌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 어른」에서 최진기라는 강사가 말하는 인문학은, 미안하지만 인문학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자기계발서와 다를바 없습니다. 그의 인문학은 인간의 감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나 분노, 슬픔 같은 인간의 이야기가 없지요. 그의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 역사, 문화 그 어느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것이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가와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고려만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내면에 누구나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욕구들, 예를 들어 더 좋은(이라고 쓰고 돈 많이 주는)기업에 가고 싶은 욕구나 큰 기업의 CEO가 되고 싶다 같은 지극히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문학을 활용한 매출 증대와 개인의 성공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을 대놓고 말하기에는 너무 천박하지요. 그래서 인문학이라는 교양있어 보이는 껍데기를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위기의 인문학도 이제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실재도 존재하고 대중이 가진 좋은 이미지도 있으니 완벽했을테지요. 영악한 자본은 이제 인문학 마저도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술로 탈바꿈시켜 방송과 출판을 통해 대중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뻔뻔스럽게 벌이고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잘만 살아가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위선이라도 좀 떨어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위선을 떠는 것을 보니 역겹군요. 어차피 위선을 강자의 가면이며, 위악은 약자의 생존술이니까요. 탐욕으로 얼룩진 얼굴을 인문학이라는 가면으로 가린다고 해도 그 뒤에서 풍겨오는 악취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후각이 예민한 시청자들은 아마 금방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교묘하게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자극해서 이윤극대화의 절대명제를 실현하려는 눈물겨운 노력 앞에서 게스트와 대중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군요.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깨달아서 그렇게 공감의 끄덕임을 계속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문학 강의에서 당당하게 '정답'을 만들어놓고 방청객과 게스트에게 정답을 묻던 최 강사에게서 (이 장면을 소크라테스가 봤다면 기가 막혔을텐데) 자신이 처한 문제들에 대한 정답 역시 찾고 있다가 그 정답을 찾아서였을까요?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방송사에서 중요한 것은 시청률과 광고겠지요. 그것은 어느 프로그램이나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그런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인간을 절대가치로 두는 인문학의 정수를 맛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런 프로그램에게 어른이 되기 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묻는다면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본이 떠먹여주는 이유식만 먹어서는 평생동안 스스로 사냥을 떠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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