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섭 지음,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은행나무, 2015
어린 시절, 집에 한 대뿐이던 텔레비전의 채널선택권은 아버지의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 때는 채널이라봐야 고작 KBS1과 KBS2, 그리고 MBC 정도였지만 말입니다. 그 중에서 아버지가 유달리 챙겨보고 좋아하던 프로그램은 KBS에서 방영된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나 「동물의 왕국」같이 동물들이 나오는 것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와~ 우~와~ 우~와~ 퀴즈탐험~"으로 시작되는 오프닝이 기억나네요.
동물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거야 당신의 취향이셨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장면, 특히 사자가 새끼가젤들을 사냥해서 잡아먹는 장면을 본 뒤에 옆에 있던 저한테 "저것 봐라. 세상은 저런 곳이다. 강하면 잡아먹고 약하면 잡아먹히는 거야."라고 말이죠. 어린 저에게 약육강식의 논리를 주입하는데 있어 맹수가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장면 만큼 효과적인 시청각자료가 없었을테니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 아버지들이 그렇게 동물 나오는 프로그램들을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친구나 연배 가까운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랬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들이 왜 그런 프로그램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자녀들에게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생존논리가 시각화된 증거로서 사람들에게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동물들이 살아가는 원리를 마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법칙처럼 말입니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동물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통제하고 사람으로서의 행동양식과 양심을 갖춘 존재입니다. 그래서 동물과 우리 인간이 구별되는 것이지요. 동물로서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해서 '인간이나 동물이나 같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예절과 도덕, 윤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시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아무리 교육을 해도 동물들에게는 예절과 도덕, 윤리를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절과 도덕, 윤리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성공의 첩경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듯 싶습니다.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경제적 불안이 실존을 위협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것은 오히려 장려되는 듯한 분위기여서 더욱 걱정입니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가 한 말은 그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 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 장강명 지음, 『한국이 싫어서』, 민음사, 2015, 9~10pp.
이번 강남역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자가 또다시 약자를 찾아 희생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건장한 남성들에게는 위협도 가하지 못하면서 결국 자신보다 힘이 약한 여성을 상대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동물의 왕국이 되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습니다. 아마 조현병을 앓았고,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더라도 자기 앞에 추성훈 선수와 같이 건장하고 강한 남성이 있었다면 조현병은 발병하지 않았고, 분노조절은 매우 잘 이뤄졌을테지요. 피해자가 숨진 것은 그저 힘이 약한 여성이었다는 이유 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강자의 위치에 설 자격은 그리 많지 않지만 약자의 입장에 처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비정규직, 동성애자, 장애인이 그러할 것이고 심지어는 지방에 거주한다는 이유마저도 그 이유가 됩니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약자가 더 약한 약자를 괴롭히고 착취하는 게 일상이 되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팍팍해 지는 것이지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 309동 1201호(이하 김민섭 작가)도 이런 구조에서 허우적거리는 청년입니다. 그가 약자의 위치에 선 것은 지방대에서, 그것도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라는 이유입니다. 간신히 학위를 받고서도 시간강사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얼마 전 주민센터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 건강보험료 납입액을 12,000원으로 적었더니 어제는 전화가 와서 '0'을 하나 빼먹으신 듯하다, 고 했다. 그래서 정확히 적은 것이 맞다, 고 하자 아....... 하고 뭔가 횡설수설하다가 실례지만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물었다. 저는 대학교 시간강사이고 건강보험료를 등록해준 곳은 맥도날드입니다, 아니 대학에서 건강보험이 되시잖아요, 죄송합니다 대학에서 안 해줘요, 그럴 리가요, 정말 그렇습니다. 대학에서 노동자의 최소한의 안전망이라 할 수 있는 4대 보험조차 보장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모두가 놀란다.
- 309동 1201호 지음,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은행나무, 2015, 51p.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은 그 말이 무색하게 그 구성원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많은 적립금을 쌓아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자인 시간강사들에게 연구실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4대보험도 적용해주지 않으면서 그 많은 등록금을 거둬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진리와 자유를 탐구하기는 커녕,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경쟁에 매몰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인류지성의 전당이 냉혹한 생존경쟁의 장이 돼버린 것이지요.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책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노력하면 된다'구요.
"노력하면 되는 거 아니니?"
언젠가부터 나타난 많은 '힐링 전도사'들은 '꿈', '도전', '열정'과 같은 단어들을 청년의 미덕으로 제시한다. 듣기엔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구축한 '청년론'은 젊은 세대들의 아픔을 그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규정해 내기에 문제가 된다. 이 마법의 논리를 구성하는 핵심은 바로 '노력'이다. 취직하지 못하는 것, 연애하지 못하는 것, 그 어떤 모든 것들이 기성세대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청년 세대를 위한 위안이나 동기부여가 되지 못한다. 그저 자기혐오감을 증식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들여다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 309동 1201호 지음,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은행나무, 2015, 66~67pp.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 속에는 '노력해서 강자가 되면 된다'는 무서운 함의가 숨겨져 있습니다. 10명 중에 9개의 의자가 있으면 한 명을 제치고 9명 중에 들면 되는 것이고 5명 중에 4개의 의자가 있으면 역시 한 명을 제치고 4명 안에 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무서운 논리, 즉 한 명을 희생시켜서라도 살아남는 강자가 되면 그만이다는 의자놀이의 룰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힐링, 즉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준다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런 식이니 아주 막장이지요.
발전과 개선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희생물로 삼아 살아남은 자들이 안도하는 경쟁이라면 이 경쟁은 경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벌이는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지요. 이것이 일상이 되고, 삶의 준칙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 주변의 사람들은 동료나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거나 나를 착취하려 드는 사람으로 보이기 십상입니다.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이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아무래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타겟으로 삼기 쉽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이 고달픈 이유입니다.
아버지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나 「동물의 왕국」를 시청하시기는 했지만 끝까지 제대로 보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 「EBS 다큐프라임 - 생존의 비밀」을 시청해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랑이와 사자 같은 맹수들을 직접 찾아 그들의 생활을 카메라에 담은 이 프로그램에서 저는 아버지가 본 것과 다를 것들을 보았습니다. 제 아무리 사자라고 하더라도 초식동물들이 떼로 모여 저항을 하자 공격은 고사하고 오히려 쫓겨서 도망을 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자들은 약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이유로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초식동물들의 이유와 같습니다. 강자에게 홀로 맞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약자가 뭉치면 강자라 하더라도 감히 쉽게 덤비지 못합니다. 그것이 희생을 줄이고 착취를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의자놀이를 벌이면서 '나만 살아남으면 돼'라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약자는 서서히 줄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차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선 여성이기 때문에 희생당한 피해자를 공감하고 함께 아파해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