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부 지음, 방현희 옮김,『표해록漂海錄』, 알마, 2009
'통通하지 않고 고여있으면 썩는다.' 어릴 적 시골에 살면서 관찰을 통해 그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고여있는 물웅덩이는 필연 썩게 되고 그곳에 장구벌레 같은 해충의 알이나 유충들이 삽니다. 반면 맑게 흐르는 시내川나 계곡물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송사리와 가재가 놀던 그 맑은 물에는 자연의 생명력이 넘실 거렸습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부위를 단단하게 묶어서 혈액의 순환을 막아놓으면 대번에 괴사가 벌어집니다. 모두가 통通하면 살고 막히면 죽는 것입니다.
교과서를 통해 한국사를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벽란도'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경開京(현 개성시)을 흐르던 예성강의 하구에 있던 국제무역항이었다고 하지요. 극동아시아의 고려는 중국대륙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멀리 중동과도 활발히 교역하던 나라였습니다. 사람과 물자가 빈번히 교류됐고, 문화 역시 다채롭게 주고 받았습니다. 고려는 세계와 통通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불행히 쇄국으로 돌아선 한반도는 고립된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해 대륙과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을 버린채 말이죠. 조선인들의 활동무대는 좁아졌고, 그들의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로 협소해졌습니다. 공식적으로 개인이 해외와 교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우연한 사고로 인해 해외를 다녀온 조선사람이 몇 있습니다. 그들 중 다행히 사대부가 있어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지금도 전해지고 있지요. 조선 성종~연산군 대에 살았던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의 『표해록漂海錄』이 대표적입니다.
『표해록漂海錄』은 이름 그대로 바다海를 표류漂한 기록錄입니다. 최부 선생은 제주에서 공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의 부음訃音을 전해듣게 됩니다. 고향인 나주를 향해 지체없이 배를 띄웠으나, 불행히 풍랑을 만나게 되고 일행과 함께 배 한 척에 몸을 의지해 표류하게 됩니다. 배는 수 십일을 표류한 끝에 중국의 양자강楊子江 하류 근방에 도착합니다. 물론 식량부족과 탈수, 해적들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말이죠. 그야말로 목숨을 건 표류였고, 천운으로 목숨을 건진 겁니다.
당시의 중국은 명明왕조가 지배하던 시기였고, 중국의 경제력은 이미 양자강(혹은 장강長江) 이남, 즉 강남지역으로 옮겨와 있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도착했던 최부 일행은 거대한 세계와 조우하게 됩니다. 물론 당시 중국의 해안가를 약탈하던 왜구倭寇로 오인받고 문초를 당하는 등 어려움은 계속됐지만, 곧 오해가 풀려 수도인 베이징北京으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떠납니다. 이 기행 중 남긴 최부 선생의 기록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기에 당시 중국 강남지역의 문화와 실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대접받게 됩니다.
드라마나 소설 같이 2차, 3차 창작물은 고증이 정확치 않거나 재미를 위해 왜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의 어떤 모습을 직접 관찰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1차 사료, 즉 당시의 기록을 직접 읽어보는 것으로 대체해야 했습니다. 『표해록』같은 책으로 말이죠. 헌데 이번에 책을 선택하는데 실수가 있었습니다. 전자책으로 읽으려 샀던 알마출판사의 『표해록』은 초등생용으로 동화작가에 의해 다시 쓰인 판본이더군요. 지나치게 친절한 주석이 너무 많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진부한 교훈을 강조하는 등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적합해 보입니다. 원전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한길사에서 출간한 판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어쨌든 더 넓은 세계를 직접 보고 겪은 최부 선생의 경험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대의 편제나 무기의 선진화, 농업기술과 장비의 진보를 이룬 당시 중국의 모습은 선생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신臣(주-최부 자신을 뜻함)이 부영(주-최부 일행을 안내하던 중국 관리의 이름)에게 말했습니다.
"수차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당신의 어디에서 수차를 보았습니까?"
"지난번 소흥부를 지날 때 어떤 사람이 호수 언덕에서 수차를 돌려 논에 물을 대고 있는 것을 보았지요. 힘을 적게 들이면서 물을 많이 퍼 올립디다. 가뭄에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더군요."
"수차는 물을 푸는 데만 사용될 뿐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우리나라는 논이 많은데 자주 가뭄이 든다오. 만약 수차 제작법을 배워 우리 백성에게 가르쳐 준다면 농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대가 조금만 수고해 가르쳐 주면, 우리 백성 대대로 큰 이익이 생길 것이오."
- 최부 지음, 방현희 옮김,『표해록漂海錄』, 알마, 2009, 146p.
실제로 논에 물을 대는 수차水車를 보고, 조선의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 선생은 중국관리와 농민들에게 그 원리를 묻기도 합니다. 이걸 조선에 들여가면 만백성이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면서요. 이런 살아있는 기록을 통해 당시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는 것과는 다른, 훌륭한 타임머신이 되어 줍니다.
기록을 통해 과거를 살았던 사람을 만나고 그의 생각을 들어보며, 당시의 사회상을 구경한다는 것은 책을 통한 과거로의 표류와 같습니다. 책 속에 있는 사람들 역시 희노애락으로 울고 웃으며, 아름다운 문화를 이루거나 혹은 파괴하며 산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지요. 이 속에는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이런 경험은 독서를 통해 가능하니, 책은 일종의 타임머신이 아닐런지요? 독서는 그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시간여행이구요. 예나 지금이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독서의 여정旅程이 꾸준히 권장되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상을 지배하는 답답함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인천공항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떠납니다. 아예 떠나는 사람도 있고,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보통 여행旅行을 다녀온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행보다는 관광觀光을 다녀온 듯 합니다. 다른 세계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어디가 멋있었고, 무엇이 맛있었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보아서 말입니다. 관광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 실제로는 경제적 여유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조차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길을 책 속으로 표류하는 길 뿐입니다. 목적지도 불확실한 이 표류를 통해 우리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은 물론 과거에 살았던 사람까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살았던 세계와 사회를 엿볼 수도 있구요. 이런 여정을 통해 경제적 문제와 시간의 부족으로 가로막힌 우리의 삶과 인식의 지평을 거대한 외부와 통通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썩지 않고 살 수 있게된 것이죠.『표해록』를 통해 최부 선생을 만나고, 함께 명대明代의 중국 강남을 다녀오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