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상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사랑B Oct 17. 2021

익숙하지 않은 것과 함께 사는 법

 나는 본래 기기 욕심이 없다. 스마트폰이든 노트북이든 딱히 신상품이나 다다익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자책 단말기(이북리더기라고도 부르는)에는 욕심이 많다. 기기 하나에 책을 많게는 천 권까지 저장해서 들고 다니며 내킬 때마다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일까? 몇 년 쓰다 보니 저장용량이 부족해서 하나씩 하나씩 기기를 늘렸고 어느새 다섯 대가 되었다. 32기가짜리 마이크로 SD 카드를 2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는데 같은 용량의 새 기기를 신나게 사들인 거다. 나만 이런가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전자책 단말기를 여러 대 보유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10대 넘게 보유한 사람도 있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데서 위안을 얻었지만, 그래도 더는 지르지 말자고 결심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오닉스에서 노바 시리즈 신상품을 출시한 것은.



출처 : 이노스페이스원 공식 홈페이지



 광고 이미지를 본 순간 너무너무 갖고 싶어서 머리 싸매고 고민했다. 전자책 단말기가 다양한 크기와 기종으로 다섯 대 있는데 또 살 필요가 있냐, 지금 가지고 있는 기기로도 책을 오천 권은 보유할 수 있다, 사 봤자 들고 다니는 기종이 정해져 있어서 자주 쓰지 않을 거다, 흰색 계열 단말기가 없어서라는 건 핑계고 그냥 예뻐서 갖고 싶은 건데 거기에 수십만 원 쓰는 건 낭비다…… 신상 기기를 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 이유들을 들어가며 밤낮으로 나를 타이르기를 어언 한 달째에 결국 두 손 들었다. 갖고 싶은 것은 통장을 털어서라도 사는 사람이 나다. 사용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중고로 팔아도 되니까, 일단 지르자!


 이런 기적의 논리로 드디어 구매한 오닉스 북스 노바 에어는, 마음에 안 들기는커녕 아주 쏙 들었다. 일반 단행본 크기인 7.8인치에 스마트폰만큼 얇아서 한 손으로 들기 좋고, 안드로이드 버전이 높아 어지간한 앱은 모두 설치할 수 있으며, 저장 용량도 32기가로 넉넉했다. 흰색 계열 논 플랫 패널이라 액정 사면에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 조금 어색하지만 독서에 방해되지만 않으면 괜찮다. 배터리 성능은, 무려 신제품인데 지금까지 써본 기기들보다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을 테다. 무엇보다 액정 질감이 종이 질감과 매우 비슷해서 대만족하고 있다. 책장 넘김과 스타일러스 펜 반응속도도 빠르고 글씨도 선명하게 잘 써진다. 덕분에 신기기 구매에 따르는 온갖 잡다한 감정은 저 멀리 우주로 보내버렸다.



오닉스 북스 노바 에어 실물. 흰색에 가까운 옅은 회색 계열 베젤이 So beautiful.



 그런데 예상치 못한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전원 버튼 위치였다. 전자책 단말기 전원 버튼은 대부분 베젤 상단 오른쪽에 있는데 노바 에어는 왼쪽에 있었다. 오른손으로 기기를 들고 검지로 버튼을 길게 눌러서 부팅하려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당황했다. 순간 불량품인가? 했다가 시선을 약간 옮기자 그제야 눈에 들어오던 전원 버튼. 케이스에서 단말기를 꺼낼 때 외에는 사용할 일이 없는 왼손 검지로 버튼을 누르면서 투덜거렸다. 불편해서 어떻게 쓰라고 버튼을 왼쪽에 달아뒀담. 인터넷 리뷰에도 이런 얘기는 없었는데. 이럴 거면 7.8인치 말고 6인치로 만들지, 오른손으로도 전원 켤 수 있게.


 물론 이 정도 불편함 때문에 기기를 중고로 되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전원 버튼 위치만 빼면 마음에 드니까. 사람이라면 그 '~만 빼면 괜찮은 애야.'라는 판단이 위험할 수 있지만 전자책 단말기는 책 읽는 도구일 뿐이고 나는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 호모 파베르다. 버튼 위치야 적응하면 그만 아닌가. 7.8인치는 아무리 가볍고 튼튼해도 손안에 쏙 들어오는 6인치에 비해 휴대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주로 집에서 쓴다. 집에서는 두 손 아니라 두 발로도 온갖 물건을 쓰는 게 사람이다. 여섯 대 중 한 대가 버튼 위치 다르다고 해서 책을 못 읽는 것도 아니고, 하나쯤은 그럴 수 있는 법. 오히려 왼손잡이 유저들은 좋아할지도 모른다. 왼손으로 밥 먹고 글씨 쓰는 사람은 버튼이 왼쪽에 있어야 편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왼손잡이 유저들은 여태 이런 불편함을 어떻게 견뎌온 걸까?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



 예전에 이적의 <왼손잡이>를 즐겨 듣고 불렀었다. 그때는 멜로디가 좋아서 좋아했지 가사 내용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왼손잡이의 자기주장을 담은 철학적인 가사다. 하긴, 오른손잡이인 나도 어릴 때부터 왼손잡이는 재수가 없다는 둥 집안에 왼손잡이가 있으면 가운이 좋지 않다(?)는 둥, 왼손잡이에 대한 갖은 나쁜 속설을 들으면서 자라왔다. 그때는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하는 사람도 흔했다. 그 말인즉 왼손을 주로 쓰는 사람은 바르지 못한 사람, 어디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이 때문에 왼손잡이들은 왼손으로 수저를 쥐면 손등을 맞으면서 오른손으로 쥐라고 혼이 났다. 문득 전에 SNS에서 본 글이 떠오른다. '왼손잡이는 고집이 세다. 고집 세지 않은 왼손잡이는 모두 교정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보다 고집이 세다는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해진 틀에 맞지 않는, 익숙하지 않은 소수를 터부시 하는 사회에 대한 풍자일 테다.


 그러나 왼손잡이는 사회 곳곳에 있다. 유명인들 중에도 왼손잡이가 제법 있고 직장에서도 적지 않게 보인다. 우리 아빠도 왼손잡이라 망치질과 샤워를 왼손으로 하신다. 보기 힘든 것은 왼손잡이가 아니라 왼손잡이용 물건이다. 대부분 오른손잡이용으로 만들거나 오른손잡이의 편의를 고려해 설계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왼손잡이는 불편할 때가 많을 것이다. 왼손으로 차키를 집었는데 시동장치가 오른쪽에 있어서 손을 바꿔야 한다든가, 왼손으로 샤워기를 쓴 뒤에 오른쪽 거치대에 걸어야 한다든가. 만일 왼손잡이 중에 위인이 많다면(혹은 반대라면) 타고난 지능이나 성품보다는 평생에 걸쳐 맞지 않는 것들과 부딪치며 살아온 환경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다.


 다수는 대체로 소수를 포용하는 데 인색하다. 마이너리티가 자기 모습대로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쉬이 투덜거린다. 그런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하지만 그건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전원 버튼이 왼쪽에 달린 전자책 단말기를 쓴다고 해서 본성을 거스르고 억누르며 사는 사람보다 더 불편하지는 않을 거다. 그건 오른손으로 기기를 잘 받치고 왼손으로 버튼을 누르면 해결되는 사소한 불편일 뿐이니까. 전자책 단말기의 제일 중요한 기능인 책장을 넘기는 방향은 여전히 오른손잡이에 맞춰져 있다. 아마도 책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도록 만들면 많은 오른손잡이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왼손잡이가 책장 넘기는 방향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익숙하지 않은 것과 공존하는 데는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훈련이 필요하다. 왼손잡이들은 아마 일생에 걸쳐 오른손잡이들의 세상에서 사는 법을 훈련해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비록 손바닥보다 약간 큰 기기를 사용하는 일일 따름이지만, 일상의 세세한 낯섦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려 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다 그런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확천금의 행복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