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 아무나 할 수 있을까
꿈! 꿈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매우 밝다. 긍정적이고, 힘이 있다. 크리스천에게 꿈 또는 비전이라는 말도 종종 쓰인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택하신 이들에게 꿈을 주신다. 그러한 꿈은 소명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이 된다. 이러한 꿈에 믿음이 결합되면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신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또 우리에게 '무엇이든 기도로 구하면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물론 이 말씀을 올바르게 믿기 위한 참된 태도가 필요하다). 세상에도 비슷한 가치관이 있다. '꿈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좌우한다' 등과 같이,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이뤄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소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에서 유명한 문장이 있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한 때 이 문장이 현실성 없는 이상만을 쫓는 이들을 풍자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본래 의미는 포기하지 않는 희망과 노력일 테다. 창조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꿈을 들어줄 대상이 없다. 그래서 자꾸만 다양한 형태의 신을 만든다. 그 신은 우주, 하늘, 동물, 사람 등 결국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램프의 요정 지니를 찾는 일일 뿐이다.
사람들은 꿈을 가질 때 왜 '신'을 찾게 될까? 꿈이라는 속성 자체가 현실 위에 잊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닌 이상에서 끌어 온 소원은, 그 이상적인 차원에 속해진 믿음의 대상이 필요하다. 이 신은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한다. '나는 나 밖에 안 믿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의 믿음의 대상은 현재의 자신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미래의 나'이다. 즉 자신에게 긍정적인 예측을 둔다. '나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등 사실은 자기도 앞 일은 잘 모르지만,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믿는 만큼 노력해나가자는 스스로 다짐의 행위다. 문제는 그들이 이미 염두하고 있는 만큼 미래 일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자기가 결심한 만큼 이뤄낼 수 있을지 등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눈에 보이는 대상이자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본인이기 때문에 믿음에 더 큰 가능성을 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더 말이 안된다고 여긴다.
반면 크리스천은 어떠한가? 말했듯이 우리는 창조주 신을 믿는다. 꿈에 관한 설교를 접해본 분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듣는다. <하나님은 배경을 보지 않고, 마음의 중심으로 그 사람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낮은 자(아무것도 아닌 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역전을 대가시다.> 그러니 현실 너머의 꿈을 꾸고, 그 길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향한 무한 믿음을 강조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그 자녀에게 복 주시고 선한 길로 이끄시길 원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이 믿음 안에 파고드는 교묘한 교만이자 위선의 공격을 간파해야 한다. 바로 '게으름의 책임전가'다.
똑같은 꿈이 있는 일반인 A와 크리스천 B가 있다고 해보자. 우선 A는 자기 자신만을 믿는다. 그래서 그 꿈을 이뤄주는데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한다. 그에 따른 결과의 책임도 자신이 진다. 물론 A의 성품에 따라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정해진다. 꿈이 실패했을 때는 원망의 대상을 찾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크리스천 B는 꿈을 꾼 시점부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고,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한다. 여기서 고민이 찾아온다. '교회에서 자신의 열심히 앞서면 안된다고 하는데, 그럼 내가 어디까지 노력해야 하는 거지?' 곧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이끌어 주실 거야.'라고 막연히 믿으며 자신도 모르게 열심을 조금 덜어낸다. 혹은 반대로 자신의 열심히 너무 강해져 신앙이 내 꿈을 이뤄주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 그 후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낙담의 크기만큼 하나님께 원망을 돌리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이 꿈을 주셨잖아요, 왜 들어주시지 않으신 거죠?'라고 따진다. 물론 분노가 빠지면 다시 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지만 말이다. 성공했다고 해도 교만이 쉽게 찾아와 공격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일의 노력과 결과를 믿음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일반인들보다 더 위선적인 내면이 있다. 이 말의 뜻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인간의 열심히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B의 마음을 더 면밀히 살펴보면서, 그 중심이 향하고 있던 곳을 알아보자.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다.'
→ 꿈이 크고 거창할수록, 남들과 다르고 더 특별하다는 교만한 마음.
: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다면 그만큼 낮아지고 헌신해야 하는 몫이다. 멋진 꿈을 앞세워 타인에게 우열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시작부터 중심에는 교만이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이끌어 주실 거야.'
→ 노력 안에서 오는 힘듦은 느끼기 싫지만, 성공을 바라는 게으름.
: 현재 단계를 넘어서고 발전하기 위해 엄청난 성실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당연히 어렵다. 힘이 많이 든다. 또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 모든 험난한 시간의 고통을 겪는 일은 누구나 스트레스받는다. 이 고통을 받기 싫어서 믿음을 핑계로 열심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러면서 성공은 하고 싶기 때문에, 믿음을 붙잡는다.
'하나님께서 이 꿈을 주셨잖아요, 왜 들어주시지 않으신 거죠?'
→ 결과에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을 돌리는 마음.
: 올바른 열심과 믿음이 있던 사람은 결과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복 한다. 실패에 대한 원망이 격한 사람일수록 그 꿈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빠진 채 자기를 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공'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한번 살펴보자.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3명의 종에게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 1 달란트를 줬다. 5 달란트와 2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돈을 사용하여 각각 그만큼 더 값을 불려 이후에 칭찬을 듣는다. 하지만 1 달란트 받은 사람은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고대로 주인에게 드린다. 이때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화를 내며, 그 돈 마저 빼앗아 10 달란트 가진 자에게 준다. 어릴 때는 이 점이 의아스러웠다.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그 종에게는 화를 낸 걸까, 싶었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1 달란트 받은 종은 크리스천 B와 닮아 있다. 우선 그는 고작 1 달란트였다는 사실에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크고 멋진 꿈이 아니었다는 데서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능력 있는 주인이 알아서 보상을 해주실 것이라고 여기며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에 자신의 달란트를 가장 최선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마침내 그 달란트까지 빼앗겨 버렸을 때, 주인에게 원망을 돌릴 것이다. '고작 1 달란트로 뭘 할 수 있다고! 나도 5 달란트 받았다면 안 그랬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종에게는 달란트 값이 중요했다. 하나님에게 각 사람의 꿈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일을 받은 사람의 태도와 중심을 보신다.
다시 B를 떠올려 보자. B의 마음에 공감이 가는가? 찔림이 있는가? 나도 그렇다. B는 바로 내 옛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부터 지금까지 일과 영성 사이에서 끈질긴 씨름을 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 시간 동안 너무나도 연약하고 이기적인 내면을 마주하면서 숱하게 깨어지고, 단련되게 해 주셨다. 그렇게 겪어온 연단의 길을 통해 지금은 좀 더 '주님과 동행하는 일', '청치기의 삶' 그 좁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단번에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미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아시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끊임없이 정욕과 싸워 낮아지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기다리신다. 또 그러한 길로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해가신다.
전문 직업이 높은 대우를 받는 이유는 그 직업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이다. 또 올바르게 그 업무를 이행해내기 위해서 많은 시간 공부를 하고, 필요한 지식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 오랜 시간 성실하게 공부해야 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 기간 동안 꾸준히 그 직업을 얻을 수 있는 단계로 한 발자국씩 성장해 나간다. 흔히 '사'짜 직업군이라고 하는 의사, 변호사, 판사 등 그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을 했는지 우리는 간접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면서 그 인고의 과정이 꼭 필요함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사람을 치료하고 올바르게 판결 내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아무나 해서 될 수 있겠어?'
비단 전문 직업뿐 아니다. 모든 일에는 준비와 발전단계가 있어야 한다. 능숙하게 수행하기 위해 내가 일을 배우며 성장해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 그럼 하나님의 일에서는 어떠할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게 해 달라는 말은 한 번씩 해보았을 것이다. 그 일을 위해 '쓰임을 받는 것'은 원하지만, 쓰임 받기 위해 '단련되가는 것'도 과연 기도 안에 들어가 있을까? 세상적인 높은 직업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 동안 공부하고 자격증 따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막상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그 중심 태도와 준비는 안일하게 여기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육체를 치료하는 일보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이 어떻게 더 간단할 수 있을까. 주님께 쓰임 받는 일을 위해 나아나가는 과정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꿈을 주시는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며 생각하신다.
"한 영혼을 사랑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는 일이 어디 쉬운가, 아무나 할 수 있겠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 위한 단련은 세상적인 공부 과정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수준이 중요하지 않다. 탄탄한 뒷 배경이나, 그 일을 하기 위한 전문 직업을 갖추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꿈을 꾸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과 그 중심의 태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에 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강한 용사로 성장하길 원하신다. 능력은 주님이 주신다. 그 능력을 받기 위한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할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 우리가 늘 거짓말하고,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시킨 일을 대충대충 하는 사람에게 큰 일을 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내 영혼이 그런 안일한 태도로 살고 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용하실까. 그래서 때로는 오랜 시간 단련받을지도 모른다. 또 공부와 차원이 다르게 힘들 수도 있다. 내면의 쓴 뿌리를 모두 도려내야 하고, 인간의 욕망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멋진 꿈이 당신의 인생에도 주어졌으면 좋겠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청년들은 멋진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나중에 남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크리스천 청년들의 꿈도 어쩌면 이와 다르지 않다. 꿈이 필요한 이유가 내가 더 멋진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욕망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욕망은 때로는 아주 은밀하게 우리 마음에 섞여 있어서 잘 인지하지 못한다. 혹은 성장하면서 세속화된 꿈으로 물들기도 한다. 순수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그 안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불순물이 얼마나 많이 껴있는가. 기본적으로 바른 일과 꿈을 꾸는 크리스천 삶이 되기 위해 3가지 우상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한다.
1. 꿈/나의 우상
2. 노력/열심의 우상
3. 돈의 우상
개개인의 성향과 상황에 알맞게 훈련의 상황을 마련하신다. 내 안의 우상을 제거하는 일은 엄청난 고난이 과정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 연단의 기간 이후 우리는 바른 일을 위한 순종/겸손/헌신/사랑/'예수주인의식'을 계속 배워간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예수님을 좇아가는 인생이어야 한다.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삶이 되기 위해 단련되가는 과정이다. 이후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의 사랑하는 자녀,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해내어 준 누구야, 수고했다.'라는 칭찬을 듣길 원한다.
마음의 동기에 내 정욕이 아직 섞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싶은 사람들이 귀하다. 예수님의 꿈을 꾸는 청년들이 참 소중하다. 그들은 쉽지 않은 길을 나아가며 계속 주님을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마음과 싸우고 부서질지라도, 좁은 길을 걷기를 투쟁하며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주님의 꿈을 꾸고 싶다고 부르짖는 이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갈망이 있다. 나 역시 계속 걷고 있는 이 단련의 길, 얼마나 어려울지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꿈을 사모하는 분들에게 응원과 축복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