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그림에 양진건 시
나의 바다에서 그렇게 눈부시는 안개.
언제나 그랬었다고
노쇠한 신의 재앙을 얘기하며 술잔을 돌리고
나는 일찍이 이곳에서 행복할 수 있었을까.
빈 잔은 세상처럼 넓어
새 잔이 채워질 때마다 더 깊어지는 안개.
필경 그것이 순례의 끝을 의미하더라도
지나간 것과 올 것에 대해 그 어떤 예감도 필요없고
살다보면 배보다 오히려 안개를 갖고 싶을 때가 있어
배 위에서는 언제나 바다를 바라보지만
안개 속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멸을,
삐걱거리는 취기, 삐걱거리는 슬픔을
그러니 나의 유일한 바다엔 최초에 안개가 있었다고
열띤 날개로 갈매기들도 흐린 시계를 맴돌 뿐.
정녕 출어를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힘이 아닌 어떤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인지
나의 바다가 드러내는 이 거대한 위용.
그래서 나는 세상에 곳곳에서 인간 이전에
점점 더 크게 안개를 만나는가.
/ 변시지
<"폭풍의 화가"라 불리는 변시지는 1926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945년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 조선인 최초로 일전(日展)에 입선하였으며, 1948년 일본의 최고 중앙화단인 광풍회의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 한국에 돌아와 서라벌 예술대, 한양대 등에서 가르쳤으며, 1975년에 제주대학교로 옮겨 작품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