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이 너머도(넘어도)
어무이(어머니)가 조타(좋다).
나이가 드러도(들어도)
어무이가 보고 씨따(싶다).
어무이 카고(하고) 부르마(부르면)
아이고 오이야(오냐) 오이야 이래 방가따(방갑다).”
"어무이"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마음 한 쪽에 찌릿~하는 통증이 느껴진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80세가 넘어도 "어무이가 보고싶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지금 우리 엄마도 할머니 산소에만 가면,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단어로 할머니를 부른다.
"어무이~~"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떨린다.
87세 되신 이원순 할머니의 시.
이뿌고 귀하다.
우리 손녀 다 중3이다.
할매 건강하게 약 잘 챙겨 드세요.
맨날 내한테 신경 쓴다.
노다지 따라 댕기면서 신경 쓴다.
이뿌고 귀하다.
이뿌고 귀하다, 라는 짧은 문장이 터질듯 팽팽하게 느껴진다.
공기로 가득한 풍선처럼 손녀딸에 대한 사랑으로 터질듯한 문장.
96세, 박월선 할머니의 시.
여든이 넘어 한글을 깨우친 할머니들이 쓴 시 4편이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6.25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쳐나온 할머니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을까...
80세가 되기 전까지 한글을 모른채 살아왔던 그들의 삶은 얼마나 어둡고 답답했을까, 또 두려웠을까...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기꺼이 80세의 나이를 잊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감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온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정성을 다해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글을 쓰셨다!
이 기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인간에게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직업이라서 혹은 뭔가 유익함을 가져다 주는 이유로 글을 쓴다면 굳이 필요없는 질문이다.
잘 살기 위해서, 내 성장을 위해서,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온갖 "나 다움"을 위한다는 이유도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힘들고 고통도 따르는 작업이다.
뭔가를 "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에.
읽는 행위는 텍스트를 "소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쉽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어내면 된다.
87세, 96세...
겨우 깨우친 한글 실력으로 내 이름, 남편 이름, 손자손녀, 친구 이름을 따라 써보고
겨우 더듬더음 책을 읽어 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일, 하지만 충분히 기쁠만한 일 아니었을까?
굳이 이 힘든 생산 활동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까?
나의 의심과 예상은 보기 좋게 뒤집힌다.
할머님들의 글쓰는 행위는 그래서 "쓰는 인간"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글을 쓰고자 하는가?"
할머니들의 투박한 시에는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누워 있다.
추상적인 아름다움도, 인간 심연을 들여다보는 통찰도, 철학도 아니다.
그저 그녀들의 삶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삶을 그저 흘려보내 버리지 않고,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낭만일까?
특별한 이유가, 유익함이 있어서가 아니라도
기꺼이 하는 일.
별을 보는 일,
느릿느릿 기차를 타고 창 밖 풍경을 멍하게 쳐다보는 일.
낯선 길을 그냥 걸어 보는 일.
혼자 마실 커피를 정성을 다해 내리는 일.
이런 일을 낭만이라 한다면,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일까?
따뜻한 커피 한잔과 노트북, 혹은 꾹꾹 눌러쓰기 좋은 노트와 연필,
그리고 내 일상과 마음의 한 조각을 꺼내어 쓰다듬는 일
남몰래 누리는 나만의 멋진 일, 나의 낭만...
지금은 그 저 "둘 다!" 라고 해 두자.
내가 굳이 쓰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이유.
96세가 된다해도 그리 살고 싶은 이유.
내 삶의 어떤 순간들, 그 흔적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
그리고, 나만의 낭만을 즐기고 싶어서.
더 나이가 들고, 내 삶의 진도가 나가고 보면,
더 정확한 답을 찾게 되겠지 싶다.
남아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오늘도 이렇게 굳이 읽고 쓰는 사람으로 남으려 동동거리는지 이유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