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바람 한 줌, 그리고 나

1화 책을 통해 두려움 속에서 나를 대면하다

by 서수정


죽음의 문턱에 섰던 그날, 나는 오직 숨을 고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은 간헐적으로 찾아왔다가 점점 더 짧은 간격으로 몰려왔고, 그때마다 숨이 막혀왔다.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고,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머릿속에는 그 어떤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고, 시술이 끝난 뒤 중환자실의 고요 속에 누웠고,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책은 늘 내 곁에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 다르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활자를 따라가며 읽는 동안, 몸의 통증보다 마음의 두려움이 먼저 가라앉았다. 책은 단순한 지식의 통로가 아니라, 고통을 견뎌낸 나를 붙잡아 주는 손길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책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법관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던 이반은 가족이 곁에 있었음에도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위로를 받지 못한 채 홀로 죽음을 맞는다.
주변의 시선과 체면을 지키느라 애써왔던 삶은 결국 고독으로 귀결되었고, 그의 마지막은 뼈아픈 성찰로 남았다.
나는 병상에 누워 그 장면을 떠올리며,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고독해질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가족조차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두려움, 그 벽 앞에 선 인간의 절망을 책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최근에 읽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도 떠오른다.
그 작품 역시 심근경색으로 시작해 한 인간의 생애와 죽음을 되짚는다. 서로 다른 시대와 인물이지만,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고독을 보여준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받았다.
고통이 나만의 짐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짊어져온 숙명이라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볍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반과도, 에브리맨과도 달랐다.
책을 곁에 두고 있던 나는, 그들이 맞닥뜨린 고독 속에서도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책 속 인물들이 전하는 절망은 나를 오히려 각성시켰다. 가족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책이 대신 건네주었고, 나는 그 문장 속에서 나 자신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도피가 아니라 대면이었다.

책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네 곁의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있는가?”
두려움의 순간, 책은 나로 하여금 삶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관계와 시간을 더 소중히 바라보게 만들었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나는 책을 통해 비로소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었다.
책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스쳐간 뒤, 그 의미는 달라졌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도구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나를 붙잡아 준 유일한 동반자였다. 책은 나를 살렸고, 나는 책을 통해 두려움과 마주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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