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를 마주하는 시간

비워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들

by 서수정

그는 문을 열기 전, 휴대폰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짧은 메시지였다.

“그때 그 말,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후배였다.

가벼운 안부 끝에 덧붙은 한 문장.

그는 한동안 화면을 끄지 못했다.

그때의 그는 바빴었다.

성과에 쫓겼고, 팀을 이끌어야 했고,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말이 날카로웠다.


“그 정도도 못 하면 어떻게 하려고.”

“감정은 집에 두고 와.”


그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문장이 하루 종일 귓가를 맴돌았다.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그는 늘 자신이 버티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위에서 눌리고, 책임에 치이고,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 했다고...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거칠어졌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루미의 의자에 앉자 익숙하게 자신을 변호하려던 생각들이 조금씩 힘을 잃었다.

그는 문득 시몬 베유의 말을 떠올렸다.

고통은 마음의 공간을 비워낸다고 했던가.

그래야 그 비워진 자리에는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 말을 곱씹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상처만 들여다보았다.

왜 내가 그렇게 예민했는지, 왜 그 상황이 힘들었는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은 자신의 말 앞에 서 있던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그 후배의 표정...


“나는 몰랐을 뿐일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몰랐다고 해서 괜찮고, 바빴다고 해서 이해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질문은 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하게 했다.

변명 대신 인정이, 억울함 대신 이해가 조용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를 보는 일은 나만 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남긴 말, 내가 만든 공기, 내가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함께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루미는 조명 옆에서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날개를 펼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그때 내가 좀 거칠었지.”

“상처가 됐다면 미안하다.”

아직 보내지 못한 문장이 화면 위에 조심스럽게 놓였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신의 고통만 붙들고 서 있지 않을 것이었다.

비워진 마음의 자리에 조금 다른 시작이 내려앉고 있었다.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은

변명보다 진실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비워진 자리에서, 사람은 다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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